핍박하던 자가 핍박받는 자로(11월 17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9:23-31(신약 203)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만나고 앞을 볼 수 없게 되어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사울은 사흘간 금식하면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보내서 사울을 위해 기도하매 눈이 열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는 다메섹이나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이 사울을 위해서 기도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다음에 즉시 전도자가 되어서 핍박자였던 사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고 왔는데 오히려 다메섹에서 전도자가 되자 유대인들이 당황하게 됐습니다. 사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원래 율법이 정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사울의 전도로 인해서 곤혹스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핍박자였는데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과 같은 핍박을 자신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이제는 복음을 위한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핍박하던 자가 핍박받는 자로” 변하게 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도전받는 신앙이 되고 핍박과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도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전도자가 된 것을 보는 유대인들은 당황스럽고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들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드리려고 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원래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헛소리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 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전도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사울이 전도할 때 누군가 나서서 사울이 전도하는 것을 비판하려고 했을 것인데 성경의 지식으로 사울을 이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단순한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사울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23절을 보면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가 생길 때 흔히 생각하는 방법이 죽여 없애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있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울이 자신들을 당혹하게 만드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긴 했겠지만 가장 간단한 것은 죽여 없애는 것이란 결론을 얻고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했습니다.

공모했다는 것은 한 두 사람이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이 계획에 동의하고 참여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사울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여러 날이 지나서 사울로 인해서 계속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 날’ 이라고 했는데 여러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히카나이’은 19절의 ‘며칠’(헤메라스 티나스)과는 달리 상당히 긴 시간의 간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사울이 다메섹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을 막을 길이 없는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서로 모의를 해서 사울을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해서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24절을 보면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당시의 여러 기록들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사울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메섹의 통치자들과 중요한 인물들에게 돈을 주어서 사울을 죽일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한 것으로 보이고, 당시 다메섹의 권력자들의 허락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 한 사람이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빨리 사울을 제거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권력자들을 매수했음에도 사울이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기 때문에 성문까지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담아서 달아 내렸습니다. 25절을 보면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누가는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사울을 탈출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이란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사울의 제자들’이라는 말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인칭 대명사 ‘그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사울 개인의 제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제자 즉 사울의 제자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볼 때 사울이 다메섹에서 행한 사울의 설교에 감동되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상당 기간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그곳에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그의 제자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성문을 지키는 상황에서 어쨋든 사울이 다메섹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야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울을 다메섹에서 떠나게 하려는데 그들에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한 밤중에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성 밖으로 탈출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성문은 24시간 지키고 있지만 성벽으로 달아 내릴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고 제자들은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줄로 매달라 다메섹을 빠져 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1. 예루살렘으로 간 사울

다메섹 탈출에 성공한 사울은 곧 바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해서 탈출을 했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도 사울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사울은 예루살렘 제자들과 사귀려고 했습니다. 26절을 보면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거리가 있기 때문에 다메섹에서 일어난 일이 아직 예루살렘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사귀려고 했지만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이 자신들과 교제하려는 것은 자신들을 잡으려는 술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핍박자였고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한 사람이라는 것이 다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울과 사귀거나 교제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에게 사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위해서 바나바가 발 벗고 나섰습니다. 27절을 보면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냉대를 당할 때 사울을 사도들 앞에서 보증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는데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으로서 레위인이며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원래는 요셉이었지만 설교하는 능력과 위로하는 능력이 인정되어 바나바라는 이름이 사도들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당시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지는 본문 가운데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사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전적으로 신뢰하였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많은 대화를 한 것 같고 사울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사울이 다메섹에서 어떤 일을 경험하고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전도자가 되었는지를 사도들에게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28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 라는 뜻이 되는데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이며 기독교인들로부터 경계 받거나 배척받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그들과 함께 사역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1. 다소로 보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고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전하고 변론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울의 설교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사울이 어떻게 전도를 했는지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아마도 아직은 예루살렘에는 사도들이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설교를 한다든지 하기보다는 전도에 주력한 것 같습니다.

사울이 복음을 전하매 있어 ‘담대히 말하고’ 라고 기록했는데 이 말은 헬라어 ‘파르레시아조마이’로 ‘숨김없이 자유롭게 말하는’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인정되었으며 자유롭게 전도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도들에 비해서 자신은 아직 기독교 안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보다는 전도와 선교에 주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유대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지만 헬라적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받아 논쟁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모의했다는 것은 기독교에 배타적인 감정을 지닌 유대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상가 필로(Philo)가 헬라 철학을 이용해 성경을 해석할 정도였으므로 유대인들에게 헬라 철학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 철학은 교부들에 의해 신앙을 변증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헬라 사상은 초대 교회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도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다소 출신이므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기독교에 대해서 변증 하는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그들이 대답하지 못하게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변증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도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29절 뒷부분을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헬라파 유대인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사울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죽이는 것이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다메섹에서도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탈출을 했는데 예루살렘에서도 살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을 다소로 보냈습니다. 30-31절을 보면

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위험한 상태가 되자 다소로 보내게 되는데 ‘다소’가 사울의 고향이었다는 점에서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소로 가기 위해 거쳐 갔던 곳이 ‘가이사랴’입니다.

다메섹에서 당한 살해 위협(23절)에 이어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또다시 살해당할 위협을 받고 탈출하게 되는데 이 같은 그의 수난은 16절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예언처럼 사울이 당해야 하는 고난이며 이방인 선교를 위해 져야하는 십자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다소로 가고 나서 온 유대와 갈리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가게 되었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임함으로 점점 더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핍박하는 자였을 때는 사울로 인해서 교회가 흩어지게 되었고 사울이 전도자가 되고 박해를 받는 상황이 되었을 때 사울로 인해서 유대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소로 감으로 인해서 일단은 평안한 상태가 되어 교회가 안정되고 평안한 상태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자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교회 성장에 도움이 안 됩니다. 교회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고 평안한 가운데 교회가 성장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사울이 다소로 감으로 인해서 팔레스틴은 안정된 가운데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사울은 어느 쪽에서나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적극적인 성격이 득이 될 때도 있고 실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울을 훈련시키셔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처럼 놀랍게 쓰임 받으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손안에서 복되게 쓰임 받는 주님의 도구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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