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과 가난한 여인(11월 10일 오전 예배 설교)

성경 : 마가복음 12:38-44(신약 77)

며칠 전 우연히 CBS TV를 보다가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ㄱ’자 교회하고도 불려 지던 교회인데 이 교회가 시작된 것은 조덕삼이란 분이 자기 집 사랑채를 내어주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조덕삼 집에는 이차익이란 머슴이 살고 있었는데 둘이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은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장로님이 되기 전에 영수라는 직분을 받게 되는데 주인인 조덕삼과 머슴인 이차익 두 사람이 영수가 되었고,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고 당시만 해도 신분 질서가 명백했던 시절 이었는데 주인과 머슴이 경쟁상대가 된 것입니다. 투표 결과는 더욱 놀라웠는데 머슴 이자익이 주인 조덕삼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입니다. 성도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덕삼 영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훨씬 높습니다. 그를 장로로 뽑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깎듯이 섬겼고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을 장로로 섬겼을 뿐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목사 안수를 받은 이자익 목사님을 금산교회 담임 목사님을 청빙을 하는 일에 조덕삼 장로님이 앞장서서 담임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금산교회를 세운 조덕삼 장로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째 장로로 섬긴 가문으로 알려져 있고 조덕삼 장로님의 손주가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국회의원을 지낸 조세형 장로님이라고 합니다.

조덕삼 장로님의 이야기를 한 것은 양반과 상민의 계급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자기 집 머슴을 장로님으로 섬기고 목사님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자기 교회 담임으로 섬긴 것은 그 시대에 거의 불가능한 것이지만 주님 앞에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 낮은 자세로 섬김 그리스도인이기에 소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첫째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던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동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제사와 제물보다 나은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서기관은 당시 서기관 중에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일반적으로 그 시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서기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그 시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서기관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리고 성전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부자와 가난한 여인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가난한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서기관과 가난한 여인” 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신분을 과시하는 서기관

예수님은 그 시대 서기관들의 일반적인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은 자신이 서기관인 것을 관시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지도다는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인 반면 서기관들은 자신들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인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닙니다. 38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지적하셨는데, 당시에 제사장, 서기관, 레위 인 들이 입었던 옷은 길고 술 달린 흰색의 가운을 주로 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옷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겉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잘 보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옷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됩니다. 옷은 곧 자신의 신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서기관들이 주로 입는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서기관들이 주로 입는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서기관에 맞는 예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신분을 알아주고 그에 맞는 예우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옷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38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유대 사회에서 서기관들은 일반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시장 같은 데서 서기관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고 서기관들에게 존경하는 예로 ‘랍비’, ‘선생님’ 같은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존경하는 예를 표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더더욱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랍비라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상석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39절을 보면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회당에서 상석은 명망 있는 사람이나 공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된 곳으로 토라를 넣어둔 상자 앞에 있고 모든 회중이 바라보기에 좋은 자리라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면 누가 말하지 않다고 거기가 자기들의 자리라고 생각하면서 회당의 높은 자리에 가서 앉는다는 것입니다.

잔치의 윗자리는 잔치를 할 때 제일 높은 사람들이 앉는 자리로서 제일 안쪽 중심에 있는데 중앙에는 그날 잔치의 주인공이 앉고 일반적으로 앞자리의 오른쪽에 앉아서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앉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잔치를 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기관들에게 이런 자리를 제공했고 심지어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잔치 집의 부모들 보다 서기관들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잔치 집에 가면 그 자리에 자신들이 앉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도 그 시대 서기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연합행사나 특별한 행사를 할 때 서기관들이나 지금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1. 하나님이 없는 종교인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선호하고 자신들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이야기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종교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 대신이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절을 보면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1세기의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직무에 대하여 급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바치는 자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자신들의 지위를 남용해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란 명분으로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재물을 삼키고는 정의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정의를 위반한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문서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과분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묘사하셨는데 자신들이 율법의 전문가임을 내세워서 혼자 된 여인들의 재산을 교묘한 말로 속여서 빼앗아서 자신의 것을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혼자 사는 여인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이런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예수님 시대에 종교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이 그렇게 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40절을 다시 보면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길게 기도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자랑하는 목적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자신과 하는 것이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손을 들고 오래 기도하는 외식하는 기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는 말은 앞에 있는 말씀과 연결해서 과부의 가산을 삼킨 것을 감추기 위해서 길게 기도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길게 기도하면서 그것을 기도로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기도하면 자신의 재산을 가져간 것도 다 하나님의 뜻 이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들의 수법은 서기관들의 수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거짓 지도자들이 앞으로 받을 판결이 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절을 다시 보면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에게 높임과 존경을 받기를 좋아하면서 믿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행위와 외식으로 기도하는 그런 형태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신앙에 대해서 지도하는 사람들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믿음을 이용해서 남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런 일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받을 판결을 더 중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지도자들이 겸손하고 섬기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진정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 가난한 여인의 두 렙돈의 헌금

38-40절까지와 41-44절은 같은 시간대에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서로 연결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서 헌금함 앞에서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는데

부자는 많이 넣었습니다. 41절을 보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그 당시에 성전에는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아홉 개는 일반제물 대신에 드리는 헌금과 성전 세를 드리는 곳이고 이곳에 드린 헌금으로 성전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네개 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제 헌금을 드리는 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헌금함에 헌금을 할 때 제사장 중에 한 사람이 헌금을 받으면 헌금 하는 사람이 나는 얼마를 헌금합니다. 하는 식으로 헌금 액수를 공개하는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헌금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헌금을 드릴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헌금하는 액수를 알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면서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많은 헌금을 드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서기관들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것과 같이 자신들이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알리면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부자가 많은 헌금을 하는 상황에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했습니다. 42절을 보면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렙돈(λεπτόν – 작은 것)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합니다. 데나리온은 10만원 이라고 가정하면 렙돈은 781원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두 렙 돈이면 데나리온을 10만 원으로 할 때 1,500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드란트는(κοδράντης) 로마 동전으로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부자는 얼마인지 모르지만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고 있는데 가난한 과부는 두 렙 돈을 고개를 숙이채로 몰라 다가와서 헌금함에 넣었을 것입니다. 부자는 고개를 들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헌금을 했을 것이고 가난한 과부는 머리도 들지 못하고 살며시 두 렙 돈의 헌금을 헌금 함에 넣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셨습니다. 헌금을 많이 한 부자의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과 두 렙 돈을 드리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여인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43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산술적인 가치로 말하면 상대도 안 되지만 신앙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 여인은 이곳에 헌금을 드린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드린 것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44절에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 여인은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생활비로 써야 하지만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어서 생활비로 써야 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보다 많이 헌금을 드린 것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재산에 비해서 적은 것이지만 이 여인은 가진 것 전부를 드린 것이기 때문에 가장 많은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계산법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계산법을 사용하십니다.

드려지는 액수보다는 드리는 마음과 드리는 사람의 사랑과 진정과 마음을 담은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 드릴 때 하나님은 더 큰 열매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스스로 높은 곳을 찾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자신의 전부를 드린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들에게 높아지려고 하기 보다 섬기는 자가 되고,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영과 진리를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는 예배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리를 동이고 섬기는 자가 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는 참빛 교회 모든 성도가 되어서 하늘의 복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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