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만난 사울(11월 3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9:1-9(신약 202)
사도행전 8장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던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됨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일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8장은 복음이 점점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9장은 선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사울이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선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핍박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 전도자이자 선교사가 되어 세계 선교에 크게 공헌을 했습니다. 그런 사울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면
사울과 바울은 유대와 헬라식 이름으로 로마 시민권을 갖고 태어난 바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사울이라는 이름을 얼마 동안 계속 사용했는데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역할 때도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고, 최소한 1차 전도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1차 전도 여행 중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고, 유대식 이름인 사울 대신 헬라식 이름인 바울을 본격적으로 쓰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동안은 사울은 ‘큰자’ 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 라는 뜻이라고 하고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바울로 이름을 바꾼 것이란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원래 두 개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이고 이방인 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헬라식 이름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도 ‘큰 자’가 아니라 ‘간구한 자’라는 뜻입니다.
사울을 ‘큰 자’라고 오해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는 말씀(삼상 9:2)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부르심에 충실히 하고자 헬라식 이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란 이름의 뜻은 ‘작은 자’, ‘겸손한 자’ 라는 뜻입니다.
사울의 출생지는 길리기아 다소인데 다소는(타르소스) ‘기쁨’ 이란 어원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적어도 6천 년 정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입니다. 직조물과 천막 제조 기술이 유명했으며 바울은 이곳에서 천막 제조 기술을 익혔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향을 소읍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에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에 있어 명성을 누렸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는 지금은 터키 남부에 위치하고 있고 현재의 이름은 테루수스라고 합니다.
사울은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사도 시대에 유명한 유대인 학자로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다가 잡혀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당할 때 가말리엘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사도들을 석방하게 한 사람으로 당대에 가장 유명하고 합리적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스승이었습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주전 2세기에서 주후 1세기까지의 유대교의 세 종파 중의 하나로 다른 두 파는 사두개파와 엣세네파 입니다. 사두개파는 자유주의요 엣세네파는 숙명론인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따르고 영혼의 존재와 천국과 지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 때에 바리새파는 약 6,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후에 의인은 새 몸을 입으나 악인은 음부에 가는 것, 천사의 존재, 율법의 권위 있는 해석 ‘탈무드’등을 믿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일반인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사두개인은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바리새인은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도 바리새인들의 중요한 신앙이었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울의 배경을 볼 때 그는 당대에 상류계층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고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울이 주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주님을 만난 사울”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
8장에서 빌립 집사님의 사역을 소개한 다음에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섰는데 교회가 핍박을 당하므로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자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사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1절을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말은 성도들을 죽이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종교적인 열심으로 인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도 스데반 집사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일들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은 복음을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했고 또한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도 이단들은 죽여서라도 제거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모습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은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고 행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복음의 수호를 위해서는 힘을 과시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울과 같은 생각입니다.
대제사장에게 다메섹으로 가져갈 공문을 요청했습니다. 2절을 보면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다메섹은 이스라엘 땅이 아닌데 대제사장이 어떻게 다른 나라에 있는 유대인들을 종교적인 문제로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게 하는 공문을 줄 수 있는가? 대제사장이 그럴만한 힘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지배를 하고 있고 이스라엘도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은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였고, 유대교의 대제사장이 다른 지역의 권한까지 행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공동체가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은 다메섹과 같은 지역의 회당 지도자들과 연계해 특정 종교적 사안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받은 공문은 다메섹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체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요청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공문은 직접적인 법적 권한보다는 예루살렘과의 유대인 공동체 내 종교적 권위에 기반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마카비1서 15:15-21에 따르면 루기오(Lucius)총독은 유대에서 도망한 자들을 대제사장이 유대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도록 프톨레미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 글라우디오 황제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분봉 왕으로 유대를 다스렸으므로 대제사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고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대제사장이 다른 지역의 회당을 통해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도록 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다메섹에 거주했던 유대인의 수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A.D. 66년 네로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요세푸스의 보고가 이를 뒷바침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는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있어서 중심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회당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박해 때(8:1-3) 예루살렘으로부터 피해서 다메섹으로 간 유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에 의해 개종 된 유대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3절에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은 대제사장이 준 공문을 들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으로 향해서 갔습니다.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져야 하지만 잘못된 열심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다메섹에 도착하기 전에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습니다. 3절을 보면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고 있었는데 사울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강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주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갑작스럽게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의 강도가 강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사울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울은 갑자기 임한 빛으로 인해서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강한 빛에 노출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이 감당하기 어려운 빛을 받게 되면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는데 사울은 그 빛이 너무나 강해서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강한 빛으로 인해서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초자연적인 빛으로 인해서 사울은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4절을 보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갑자기 강한 빛이 임했기 때문에 땅에 엎드린 사울에게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예루살렘에서도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했고 다메섹으로 가는 이유도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기 위한 것이었기에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성도는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5절을 보면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갑자기 일어난 초자연적인 현상에 더해서 누군가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는데 사울이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주여 누구이니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여기서 사울이 주여 라고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주여 라고 한 것이 아니고 갑작스럽게 초자연적 현상으로 인해서 놀란 사울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를 들으니까 순간적으로 주여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울에게는 이 대답이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한 적도 없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는 것도 믿지 않는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신 것은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들 즉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잡아서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 일이 결국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울은 정신이 혼미해졌을 것입니다. 사울은 갑작스럽게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황한 상황인 사울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면 네가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일방적으로 사울에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울의 의사를 묻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줄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사울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2 사도의 경우는 예수님이 친히 부르셔서 부름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 있었지만 사울의 경우는 일방적인 부름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지만 때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시내로 들어가면 너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 할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하는 대로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7절을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의 일행이 있었지만 그들은 사울이 경험한 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이 날의 상황에서 대해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은 사울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사울이 경험한 것을 실제로 경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8-9절을 보면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때 바울의 눈에 이상이 생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눈의 질병으로 인해서 고생을 평생 한 것으로 보입니다. 갈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고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후 12:7-9절에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부분에서 사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아마도 눈의 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줄 것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다메섹으로 들어갔고 사흘 동안 볼 수 없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고 가던 중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울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의 뜻을 위해서 오늘날도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합니다. 주님의 손에 의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