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월 27일 오전 예배 설교)

성경 : 마가복음 10:46-52(신약 73)

하나님의 역사는 어떨 때에 나타나는 것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떤 특별한 날이나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거나 기적이 나타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평범하지만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날을 기대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날 징조가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예수님을 통해서 또는 사도들을 통해서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특별한 징조를 보고 어떤 특별한 역사가 나타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어느 날 그 특별한 장소를 찾아갔다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이라기 보다 그날 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중에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것보다는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특별한 징조와 사인을 기대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평범하지만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저는 처음 사역을 시작할 무렵부터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에게 삶은 삶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진실하게 살아가면서 빛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특별하지 않지만 그날그날 저에게 주신 시간들을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그런 가운데 순간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매일 주어진 시간에 늘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는 것이 진실한 믿음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의 경우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평범하게 지내는 중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 간구함으로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앞을 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셨을 때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같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하실 일을 다 하신 다음에 여리고를 떠나시게 되었고, 여리고 성에서 나오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나오실 때 그곳에는 디매오의 아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있었습니다. 46절을 보면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본문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정확하게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단어는 ‘~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누구의 아들이란 표현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특이한 것은 베드로의 경우 바요나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즉 요나의 아들을 시몬이라고 표현한 것인데 여기서는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기록하지 않고 단순히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만 소개했습니다.

여리고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사람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디매오의 아들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어릴 때 누구의 아들이란 말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불려 지지 않고 그냥 바디매오 즉 디매오의 아들이라고만 불려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소리는 듣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불려 지지 않고 맹인 바디매오라고 불려 진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이 대학교수를 하기도 하고, 판사를 하기도 하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안마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도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구걸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시각 장애인들이 구걸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불려 지지도 못했고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고,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47절을 보면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일반적으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끌벅적 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누가 지나가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물었을 것입니다. 누가 지나가시느냐?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마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시지만 여전히 마음에는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란 생각이 많은 사람들 머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어느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지역을 언급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고대에는 그런 비하하는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어 하는 마음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었고, 많은 사람과 함께 지나가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47-48절을 보면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오시는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고 간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곧 바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야단을 치면서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외쳤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길을 가시면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거나 아니면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시끄럽게 외쳐대니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예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야단을 치면서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구하자 예수님께서

  1. 그를 부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을 보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조용하게 한 번 기도하고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까지 내 간절함이 주님 앞에 올려 질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49절을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예수님은 처음부터 바디매오에게 관심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동안 바디매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이 길을 가시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간절히 포기하지 않고 부르짖는 그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그를 부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부르라고 하신 것을 보면서 아마도 그가 시각 장애를 가진 걸인이니까 뭐라도 좀 주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끈질기게 간구하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시려고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디매오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전해주었습니다. 그가 너를 부르신다. 다시 49절을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아무도 바디매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에 사는 시각 장애로 인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구걸을 하는 사람이기에 무관심하게 지나쳐서 갔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돈을 주고 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아무리 크게 소리를 쳐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우리를 향해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게로 오라 나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50절을 보면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주님이 오라 하신다고 하자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뛰어 일어나 라는 표현에 대해서 현대어 성경과 공동 번역은 벌떡 일어나 로 번역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신다고 하자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평상시와 똑같은 평범한 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리를 들으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어느 특별한 날에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평소와 다름이 없는 평범한 어느 날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고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지만 주님이 언제든지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에 찾아오실 수 있고 우리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즉시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1.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앉아서 구걸하고 있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오라 하신다는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에게 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늘 아버지는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는 기도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기를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아뢸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31-32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 하늘 아버지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물으셨습니다.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 아버지께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충 적당히 알아서 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지금 나에게 간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51절 마지막 부분에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사람은 돈을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고, 내가 이렇게 구걸하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지금 이렇게 구걸을 하면서 사는 이유는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기에 눈을 뜨고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눈을 뜨고 보게 되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눈을 뜨면 스스로 일할 수도 있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에 필요한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들은 당연히 같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당장에 먹을 것을 구하고, 당장에 마실 것을 구하고, 당장에 입을 것을 구하고, 당장에 잠을 잘 곳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은 눈을 뜨고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그 순간 그의 눈이 열리고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네 병이 나았다고 하시기 보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으므로 우리 육체도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삶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으므로 구원을 받고 그 이름의 권세로 모든 질병이 고침을 받고, 그 이름의 능력으로 간구하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져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는 참빛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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