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다.(8월 25일 오후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5:33-42(신약 194)

지난 주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남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병자가 고침을 받았고, 귀신 들린 사람들이 나음을 입었고 그러므로 예루살렘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을 찾아와서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핍박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지만 천사가 옥에서 이끌어 내서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함으로 사도들은 이른 새벽에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대제사장은 이른 아침에 공회를 소집해서 사도들을 데려오라고 했지만 감옥은 잠겨있고 감옥을 지키는 사람들은 지키고 있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매 사도들은 없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성전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공회에 와서 이야기 해 주었고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잡아오라고 해서 하인들이 사도들을 데리고 공회에 끌려왔습니다.

공회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거나 전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예루살렘에 그 이름이 가득하고 했고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돌리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을 하고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게 했으나 하나님이 살리셨고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하는 이야기까지 지난 주에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의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여전히 공회에서 심문을 받고 협박을 받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의 스승이기도 한 가말리엘이란 사람이 중재안을 제시하고 사도들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말리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보상자시다.’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의 유전을 체계화한 유명한 힐렐의 손자이면서 율법 학자로서 오랫동안 율법 문제의 고문격으로 공회에 몸을 담았으며 한때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고 알려져 있고 전승에 의하면 그는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두개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바리새인들은 소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바리새인들은 공회에서 소수의 무리를 형성했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두개인보다 더 많은 영향력과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바리새인 중에 가말리엘은 지도자와 스승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권력의 욕심으로 가득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따라 신앙으로 살려고 하고 가말리엘은 그 중에서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에서 매우 합리적이고 신앙적으로 사도들의 문제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 했습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도들이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면 당연히 망할 것이고 하나님께로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가말리엘이 말을 중심으로 “하나님께로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사도들이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고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선포하면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증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려고 했다는 것은 사도들이 율법으로나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잘못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큰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자신들이 한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죽여서라도 덮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사두개인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사도들이 저런 소리를 하니까 다시는 저런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없애 버려야 한다고 분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화를 내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더 큰 악을 행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순교한 것도 헤롯의 죄를 지적함에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가 죽인 것이고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한 것도 자신들의 죄를 지적한 것에 분노에서 돌을 던져 죽인 것입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의 반응에 대해서 존경받는 가말리엘이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고 경고 겸 권면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4-35절을 보면

5: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5: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사두개인들은 대체적으로 분노한 반면에 바리새인의 대표격인 가말리엘은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충고와 동시에 권면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들이 믿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된다고 생각하지만 바리새인은 영혼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도 없다고 생각하고 영적인 존재도 부정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천사도 믿고 영적인 능력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부분만 빼면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상당 부분 일치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가 된 것도 바리새인으로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려는 것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말리엘은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36-37절을 보면

5: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가말리엘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그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고 이 사람들 즉 사도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가말리엘은 드다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가 스스로 선전했다고 했는데 B.C. 4년 헤롯 대왕이 죽던 해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많은 민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여기서 언급된 드다는 그 반란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드다는 당시 흔한 이름인 데오도수스의 약칭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드다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선전을 했고 약 400명이 드다를 따랐지만 결국은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함으로 사람들이 흩어졌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으로는 호적할 때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서 따르게 했다고 했는데 유다의 반란은 A.D. 6년경 두 번째 호구 조사 때 일어났던 것으로 요세푸스는 이 반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가 그의 동포들을 설득시켜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는데 그는 말하기를 ‘만일 유대인들이 계속 로마에 세금을 바친다면 그들은 겁쟁이들이다’라고 하였다.” 고 기록했습니다.

이 반란은 드다의 반란보다 더 큰 것으로 정치적 메시아를 갈망하던 유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란도 얼마 못가 당시 로마의 총독 구레뇨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은 모두 흩어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경우에 사람들이 미혹을 당했지만 지금은 다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당장에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계속해서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려는 것이 오히려

  1.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가말리엘은 두 가지 예를 들면서 사도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되는지를 더 지켜보는 것이 옳다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두개인들에게 충고하면서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38절을 보면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상관하지 말라는 말은 ‘손을 떼라’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손을 떼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일어났던 드다나 갈릴리의 유다와 같이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주장을 하는 것과 같으니까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저 사람들이 하는 일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너진다는 것은 스스로 붕괴한다는 의미로 사도들이 주장하는 것이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이거나 저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가만 두어도 교회는 붕괴될 것이니까 너희는 무엇을 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두고 관망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계속해서 저 사람들이 사상이나 소행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9절을 보면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가말리엘은 사도들과 교회를 가만두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무너질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사도들이 하는 일과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고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

가말리엘이 한 말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 붕괴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것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고 핍박과 환난을 당하는 것 같고 곧 무너질 것 같아도 반드시 든든하게 세워지게 됩니다.

참빛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난 교회이기 때문에 결코 무너지지 않고 주님 오실 때까지 견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1. 다시 풀려났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주도하는 공회이기는 하지만 당시 일반인들에 존경받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이야기를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교회와 사도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이 죽이고 싶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말리엘의 권면이자 일종의 타협안을 수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습니다. 40절을 보면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가말리엘은 존경받는 사람이기에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했고 바리새인들이 믿는 신앙에 근거할 때 사도들을 핍박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해서 이야기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두개인이 중심이 된 공회도 가말리엘의 말을 옳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와 사도들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사도들을 불러 들여서 채찍질했습니다.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공회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금했다는 것은 이 명령을 어기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고 심지어 돌아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채찍에 맞고 협박을 당하고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채찍에 맞고 협박을 당하고 풀려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했습니다. 41절을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이 모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벧전 1:7의 말씀과 같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또한 사도들은 그런 일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는 기회였기 때문에 능욕을 당하고 핍박과 환난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협박을 받으면서도 사도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42절을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석방된 후 사도들의 복음 사역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안았고 어떠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역을 일시라도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라는 말은 ‘매일’, ‘하루 종일’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있고 성전 경비대들이 경계를 하고 있는 성전에서도 예전과 같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집마다’라는 말은 온 예루살렘에 구석구석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사실을 가르쳤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선포했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시고, 다시 오실 재림의 왕이시라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의 유일한 이름이고 다른 이름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랑과 온유와 축복의 말로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에게서 난 우리 교회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저와 여러분은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세워지고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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