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3월 24일 종려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빌립보서 2:1-11(신약 319)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마 21:9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고 그날의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호산나는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인데 시편 118:25절에 보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 구절이 호산나의 어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호산나를 외치기 시작한 배경은 중간사 시대에 헬라인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헬라화 하려고 했는데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조롱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카비 가문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데 이 때 유대인들이 마카비를 추앙하면서 ‘호산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카비 시대처럼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길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한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고 백성들이 호산나를 부른 것은 로마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간절한 외침이었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죄 문제와 사망에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이 마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외친 사람들의 간절한 외침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려 주일이자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 사도는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 사랑과 겸손과 복종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니 라고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가 닮아가야 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에 대해서
 
1. 같은 사랑을 가지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고 할 때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친히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인데 예수님은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갖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현대어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격려해 줄 마음가짐이 되어 있습니까?” 여기서 사용된 권면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격려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권면이란 단어는 격려로 해석하는 것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말씀이 우리가 주저앉지 않고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 안에서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고 힘을 주신 것처럼 서로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망하기 보다 격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주 안에서 권면 즉 격려와 함께 사랑의 위로를 해야 합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사랑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는 형제를 위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하는 사람과 정죄 의식에 빠져 있어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위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로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같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들을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성령의 무슨 교제란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무슨 교제는 성령 안에서 진정한 교제 즉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는 각지 다른 문화적 배경과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진정한 교제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또한 서로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같은 마음으로 교제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긍휼’은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이나 ‘애정’을 가리키며, ‘자비’는 ‘긍휼’에서 비롯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한 자나 어려움에 빠진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없는 마음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두 번째로
 
2. 겸손한 마음
우리가 지녀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은 사랑과 마음과 또한 겸손의 마음입니다.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말은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이시면서도 스스로 겸손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떠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가는 겸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겸손한 마음을 품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마음을 같이하고 한 마음이 되는 것은 스스로 겸손해 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한 마음이 되고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고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다툼이라 허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역개정에서 다툼이라고 번역한 ‘에리데이아’이기주의 라는 의미로서 공동번역에서는 ‘이기적인 야심’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기적인 야심은 교만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자신 위주로 이끌어 가면서 자기 것을 만들어 가려고 하게 됩니다. 결국 교만은 욕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영이란 단어는 망상이란 의미로 ‘내용 없는 영광이나 자랑’을 의미합니다. 즉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는데 스스로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허영은 교만한 사람들이 스스로 망상에 빠져서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툼과 허영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우리 내면에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저 사람보다 잘 할 수 있고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해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할 때 겸손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내가 제일 이라고 하는 생각보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낫다는 인정을 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을 가질 때 마음을 같이하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서로 돌보아 줍니다. 4절을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겸손한 사람은 자기 일을 돌보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한다는 의미와 함께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감당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은 하지 않고 간섭하거나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교만의 특징입니다. 자기 일은 생업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신앙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로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서 자기의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한데 여기서 말하는 남의 일을 돌아본다는 것은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고 영적으로 바르게 살아가는지 또는 영적 은사를 잘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간섭과 참견의 의미가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의 손을 내밀고 영적으로 힘들 때 중보기도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3. 복종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의 세 번째는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예수님을 세상에 성육신하게 하실 때 온전한 순종을 하셨습니다.
 
복종과 순종은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성경에서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우리말 성경에서 복종으로도 순종으로도 번역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 국어 사전에서는 복종과 순종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복종은 비자발적이고 순종은 자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종은 무조건 적인 것이고, 순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스스로 순종한다는 의미라고 국어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복종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온전하고 철저하게 복종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육신 하신 것에 대해서 복종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따르셨다는 의미로 그렇게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복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종하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6-7절을 보면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의 복종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인간 세상에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자기 비하라고 표현을 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낮아지심이란 의미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하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귀농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 마음으로 시골에 가셨던 분들이 다시 대도시로 돌아오고 있어서 귀농하려고 지어놓은 집들이 빈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대도시로 다시 돌아올까요? 귀농을 하면 처음에는 공기도 좋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생활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거나 가장 큰 문제는 병원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시에 살다가 시골에 가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시고 인간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종인지를 바울 사도는 이야기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종하심에 대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8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사람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거부하실 수 있음에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는 죄 사함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심으로 이루어진 은총이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9-11절을 보면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사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복종으로 우리에게 오셨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라고 시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거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과 복종하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종려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의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어 사랑과 겸손과 복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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