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2024년 3월 24일 오후예배)
성 경 : 요한복음 20:19-31(신약 183)
 
지난 주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베드로와 주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무덤에 가서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주에 예배가 끝나고 막달라 마리아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와 동일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몇 가지 있어서 짚어보겠습니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사건에 복음서에 몇 번 기록되어 있을까요?
첫 번째로는 눅 7:36-51절까지인데 39절까지만 보면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이 여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고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만 소개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이 여인의 죄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창녀였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요한복음 12:1-3절까지입니다.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두 번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다니에서 있었고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세 번째 기록은 마태복음 26:6-7
26: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가복음 14:3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세 번째 향유를 부은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간상으로 볼 때 두 번째 이야기와 비슷하고 상황도 가룟 유다가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야지 한 것으로 보아서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은 동일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일부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사건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성경의 기록상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어드린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렸다고 알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찬송가 211장 1절에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라고 찬송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가사가 생긴 이유는 서기 591년 그레고리 1세 교황에 의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고 해석하면서 생기게 된 것으로 눅 7장의 죄인이었던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치료받았는데 카톨릭에서는 일곱 귀신 들린 것을 창녀로 해석하고 눅7장에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을 했고 이런 개념이 1969년까지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라고 가톨릭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쳐왔으며 개신교에서도 그 개념을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눅 7장의 죄인인 여인도 아니고 향유를 부은 일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말씀을 연결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죄인으로 향유를 부은 것으로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지난 주에 질문을 받고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다른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었는데 찬송가 가사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막달라 마리아를 향유 부은 여인으로 기억하게 만든 결과입니다.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잘못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밤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고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팔일 뒤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시고,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분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제자들은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 19절을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베드로와 요한일 것으로 추정되는 제자가 무덤에 가서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왔고,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말한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잡아서 죽게 만든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죽이거나 핍박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있으면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문들을 닫았습니다. 여기서 문을 닫았다는 것은 물을 폐쇄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들어오려면 확인절차를 거쳐서 문을 열어주어야 들어올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혹시라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문들을 닫아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닫아놓은 문들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부활의 몸을 입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19절 뒷부분을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에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지금 제자들은 불안하고 두려움에 쌓여있었습니다. 문도 함부로 열지 못하고 숨어서 지내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가득찬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이지어다라고 선포하면서 그들에게 하늘의 평강을 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평강과 평안이 성령님과 말씀을 통해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삶을 주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하늘의 평안으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했습니다. 20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신 다음에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직접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직접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직접 보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예수님께서 진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기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두려움이 평안으로 바뀌고 걱정과 염려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두려움은 평안이 되고, 걱정과 염려는 기쁨과 감사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평강을 선포하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다음에 제자들을 향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예수님은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가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셔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부재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떠나시지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성령님이 너희를 도와주고 너희에게 권능을 주어서 내가 보낸 사도의 일을 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의 의미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아닌 사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서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하셨는데 사도로서 사역을 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으므로 본격적인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면서 한편으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신앙 생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다음에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3절을 보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구절을 사제들에게 사죄의 권한이라고 해석을 해서 신자들이 사제에게 자기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라는 것을 합니다. 사제는 신도들의 죄에 대한 고백을 듣고 이 구절을 인용해서 죄를 사하노라 이렇게 말하면서 죄에 대해서 사하지만 이렇게 이렇게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제에게 또는 목회자에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원래의 의미로 번역하면
 
“만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그 용서받음을 선언하면(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그 죄를 (하나님에게서) 이미 용서 받은 것이요, 만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그것을 그대로 두면(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그 죄가 (하나님에게 용서받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권능을 받아서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되어 속죄의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죄를 고백하게 되고 그러면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너희가 속죄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므로 듣지 못한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런 권한을 주었다는 의미보다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게 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복 있는 믿음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계속 머무신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자리를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신 다음에 밖에 나갔던 도마가 돌아왔습니다.
 
도마가 왜 그 자리에 없었을까에 대해서는 아마도 도마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했는데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신 것을 보고 다른 길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외출했다고 돌아온 도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고 말하자 도마는 내가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24-25절을 보면
20:24 “열 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자 도마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내가 직접 그 분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내 손을 창에 찔린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처참하게 돌아가셨는지를 알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은 도마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말 그분이 부활하셨다면 내가 직접 그분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고 창에 찔린 허리에 내 손을 넣어 보고 믿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경험하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중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초기부터 있었던 오순절 운동의 비판 중에는 방언에 대한 비판이 가장 많았고 지금도 방언을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로교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성령의 은사는 끝났다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은사중단론이라고 하는데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 했지만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더 이상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가장 강하고 반대하는 것이 방언입니다. 방언을 심지어 마귀의 언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순절 교회가 우리나라에서 이런 분들 때문에 이단이란 비판을 받았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에 방언을 경험하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하게 성령의 은사를 비판하던 분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으로 하고 은사가 나타나게 되고 그렇게 경험을 하게 된 분들은 방언에 대해서 은사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의 기본 신학이 은사 중단론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방언이라 은사를 강조하지 못합니다. 장로교단 중에서도 극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교단의 목사님들 중에 사모님이 암에 걸려서 기도하던 중에 방언을 받고 치유를 받았는데 그 목사님의 교단은 은사 중단론을 이야기 하지만 그 사모님은 방언에 대해 은사에 대해서 책을 썼습니다.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도마처럼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합리적주의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으셨던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듯 오늘날도 다양한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은 네 손을 내밀어 만져 보라 즉 경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27절을 보면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날 저녁에 찾아오셨던 예수님은 여드레 후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날은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요?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실제로 손을 대고 만져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도마를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앞에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도마만 보아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먼저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고 직접 못 보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고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보고라고 믿으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경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더 굳게 믿는다면 그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경험하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7-29절을 보면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못 자국난 손과 옆구리를 만지고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즉 경험해야만 믿느냐라고 말씀하시고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본 것이 있고 경험 한 것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본 것도 없고 경험한 것이 없음에도 오직 말씀을 의지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생활 하면서 자꾸 뭔가 확인해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그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아도 믿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online.fliphtml5.com/yuhpd/gevm/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