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받은 구원(3월 10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에베소서 2:1-10(신약 311)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 구절은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예수님을 믿은 다음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삶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한 뒤의 삶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말한다면 다른 종교는 행위가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가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어떤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하늘의 복을 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은혜로 받은 구원”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된 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과거의 나와 구원받은 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었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들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기 이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나요?
 
아니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 일을 하면서 살아왔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그래도 선하고 착하게 살았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다른 사람들은 악하게 살고 거짓말도 많이 하고 나쁜 일도 많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사람에 비하면 훨씬 착하고 선하게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땅에 살아온 모든 사람들은 거기서 거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다른 사람보다 착하고 선하고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오히려 허물과 죄 때문에 죽은 인생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너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존재라고 말합니다.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바울은 먼저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들이라고 선포하면서 그 때에 즉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여기서 그 가운데라고 말한 것은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 때에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성도가 되기 이전에 그 가운데서 행했다는 것인데 다르게 말하면서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다고 말하면서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아갔다고 말합니다. 2절을 다시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풍조’의 헬라어 ‘아이오나’에 대해서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첫 번째는 종교 혼합주의 신화적 개념이 신약성경에 스며든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숭배가 혼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에베소 교인들은 현재의 악한 세대와 이 세상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 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기준이 세상의 풍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의 풍조를 따라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조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우리의 가치관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된 다음에는 우리의 가치관이 성경적 가치관이어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시대에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를 뿐만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인간 세상에서 영적인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해서 하나님이 아닌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게 하는 영적 세력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난 다음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로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요 사탄입니다.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권력과 물질과 인간의 욕심에 따라 살아가도록 조정하는 세력들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설명했는데 ‘불순종의 아들들’ 은 히브리적 표현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하여 불순종하는 사람들’ 이라는 의미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존재들이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고 거짓과 욕망을 자극해서 자신들을 따르게 하는 악한 영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3절을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3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우리 역시 과거에는 그들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곧 우리가 품고 있는 악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욕망, 아니 악한 생각이 이끌어 가는 대로 우리는 악한 일만 저질렀습니다. 날 때부터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 악한 데로만 달려나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지 못할 처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모든 사람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내면에 악을 품고 있어서 자신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던 악한 것들이 생활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은 생각 속에 악한 것과 욕망이 가득 차 있어서 결과적으로 악한 일을 저지르고 육신이 원하는대로 욕신의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삶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세상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불순종의 아들들을 따라서 살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옴으로 인해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2.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신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살리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를 죽은 자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자비라는 의미와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 즉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대로 죽게 버려둘 수 없으셨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이란 말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신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큰 사랑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5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허물과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 이기고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도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축복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십니다. 6-7절을 보면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함께 일으키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도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한 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하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는데 예수님을 믿으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늘에 앉히시지 않고 우리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히 부활시키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 앉히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신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듯이 하늘에 앉히신 것도 비록 현재 참여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없다 할지라도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민권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앞에 서 있으며 그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크신 사랑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다고 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이 은혜인데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5절에서도 괄호 안에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의 힘과 능력과 수고와 이런 것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은혜로 구원받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이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9절을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구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구원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여 받은 보수가 아니므로 아무도 자신의 선행을 내세워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우리가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것이기에 우리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여기서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고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새롭게 시작된 생활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가 서로 남을 도우면서 살도록 새로운 일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바 된 즉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만들었다고 말씀하시고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 즉 구원받은 성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받은 성도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을 돕는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오래 전에 정하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받은 은혜의 선물을 세상을 향해 베풀고 나눔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참빛 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online.fliphtml5.com/yuhpd/avdz/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