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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2024년 2월 25일 오후예배)
성 경 : 요한복음 19:17-27(신약 181)
 
지난 주에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해서 놓아주려고 노력 했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 즉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고 협박하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하라는 판결을 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사형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죄 없는 사람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은 분명히 잘못된 판결이기 때문에 빌라도에게도 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나를 너에게 넘겨준 자들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여러분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게 되었고 십자가 사형 판결을 내리고 곧바로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판결을 한다고 해도 곧바로 집행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를 지어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바로 집행하지 않고 사형 집행을 정해서 집행하는 것일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아침 일찍부터 재판이 시작되었고 급하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곧바로 십자가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급하게 이루어진 것은 당시의 상황 즉 유월절을 앞둔 상황으로 인해서 급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에게 출애굽 하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제정해 주신 절기이고 유월절의 의미는 애굽에서 해방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인류를 영적 애굽이라고 할 수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에 유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영적 출애굽 사건을 위한 희생의 어린양으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 판결이 내려진 즉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7-18절을 보면
19: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9: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판결을 받으신 다음에 “해골이라 하는 곳” 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해골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골고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마가복음은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 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해골이라는 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는데, 언덕이었을 것이고, 큰 길가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처형을 보게 했고 이것은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자는 이렇게 처참하게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지형으로 보아 예수님께서 죽으실 장소로서 적합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천하에 공포되어야 할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은밀하게 감추는 것이 아니었고 얼마든지 드러내어 선포될 일이었기 때문에 해골 즉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언덕을 골고다라고 요한은 기록했는데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갈보리 언덕입니다. 갈보리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된 것은 누가는 헬라어 ‘크라니온’으로 번역해서 썼으며(눅 23:33), 이것이 라틴어로 ‘갈보리(라틴어 calvaria)’로 번역되었습니다.
 
CCM을 부를 때 갈보리 언덕, 갈보리 이렇게 부르는 것은 라틴어를 영어에서 사용한 것으로 히브리어로 한다면 골고다이고 뜻은 해골입니다. 성경에 골고다는 언덕이라고 표현되지 않았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언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언덕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한 희생의 어린양으로 피흘림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 좌우편에 강도들이 같이 달렸습니다. 18절을 보면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원래는 두 강도와 바라바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할 예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명절 특사로 풀려나고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 판결을 받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요한은 두 사람도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기록했지만 마태와 마가는 강도, 누가는 행악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로마에 대항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누가가 기록을 했습니다. 눅23:39-43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니 너와 우리를 이 십자가에서 구원하라고 비난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를 로마로부터 구원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은 우리는 동일한 정죄를 받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죽는 것인데 삶의 마지막 순간에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고백을 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왕국이 있다고 믿으면서 나를 기억해 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사셨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접 기도를 하고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연세 드신 부모님들이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판결을 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빌라도 자신이 결정한 패를 달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항의를 했지만 빌라도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달게 했습니다. 19-20절을 보면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19: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에 대해서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권한으로 풀어주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면서 나름대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이 아닌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느낀 예수님은 종교적 관점에서 유대인들의 영적인 왕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하면서 히브리어와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로 써서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골고다를 지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를 보면서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21절을 보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에 대해서 유대 지도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강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왕이 아닌데 왜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느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으로 넘기면서 유대인의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고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자 항의를 하면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발을 했지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는 인정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진짜로 우리의 왕이 아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항의에 대해서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대답했습니다. 22절을 보면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유대인들의 항의를 들으면서 빌라도 역시 화가 났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권한으로 풀어줄 수 있음에도 유대 지도자들의 압력 때문에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을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하니까 화가 나서 대답했습니다. 내가 쓸 것을 쓴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풀어주고 싶어도 풀어주지 못했는데 명패도 내 맘대로 쓰지 말란 말이냐 하면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예수님을 풀어주지 못한 것이 자존심 상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을 끝까지 고수한 것입니다.
 
3. 십자가 아래의 상황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상황에서 십자가 아래에 일어난 상황들을 기록한 것을 보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습니다. 23-24절을 보면
19: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19: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상황에서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전리품을 갖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인은 모든 옷이 벗겨진 채로 달렸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들의 옷을 사형을 집행하는 일을 하는 군인들이 나누어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이 고급 옷도 아니고 좋은 옷도 아니었지만 군인들은 전리품의 의미로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옷이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 죄인들을 처형했고 처형당한 사람들의 옷이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이미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시편 22:18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군인들은 전리품을 취하듯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기를 하고 했다고 기록하고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곁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25절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서 울며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황에서 그 옆에서 남아 있는 분들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가까이 볼 자신이 없어서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시라도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고난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도망간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처참한 죽으시는 자리를 지키신 분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라고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모라고 기록된 분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요한의 어머니라고 해석합니다.
 
마 27: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라고 기록했는데
 
막 15: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성경에 정확하게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는 세베대라고 기록했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해서 볼 때 살로메가 세베대의 아내이고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모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는 가족과 신실한 여자 분들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우리가 요한이라고 보는데 한분의 제자가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27절을 보면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처참하게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마리아의 아픔을 보면서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도 고통 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위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에게 보라 너의 어머니라고 부탁을 했고 요한은 그 후로 마리아를 집으로 모시고 가서 어머니처럼 섬겼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받은 사랑을 전도로 나누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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