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야 나오라(7월 30일 오후 예배)
성 경 : 요한복음 11:33-44(신약 165)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느 마을에 계셨을 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시고 유대로 나사로에게 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은 유대에서는 핍박이 있는데 가시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잠들었으면 곧 낫겠네요. 라고 이야기 하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이야기 하시면서 내가 지금 그곳에 있지 않는 것을 기뻐하고 이 일로 너희가 하나님을 더 굳게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걸린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깨우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 죽을 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셔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가 있는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매 나사로가 걸어서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알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원망섞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고,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고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고 마리아에게 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른다고 말했고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이 계속 마을 입구에 가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마리아도 마르다처럼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시게 되는데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슬프게 울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왜 일찍 오시지 않으셨느냐면서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금만 빨리 오셨으면 죽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 생각이 마리아를 더 슬프게 만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자 복받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가 슬프게 우는 것을 본 문상을 온 사람들도 같이 울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고 마리아의 슬피 우는 모습은 마음을 더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상을 온 사람들도 같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비통히 여기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매우 분노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같이 우는 문상객들을 보면서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의 죽음을 죽음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잔다고 하셨는데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우는 것을 보고 영생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심령이 비통하셨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의 죽음이 슬픈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의 죽음과 영혼의 존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원래 이 단어들은 분노하신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우리 번역은 우리의 문화적 관점으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것을 보시고 또 마르다와 마리아를 생각하시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4-35절을 보면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우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는지 물어보았고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셨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은 사람으로 인해서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우는 사람들 특별히 마르다와 마리아가 힘들어 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필요합니다. 힘들어 하는 사람과 절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이야기 했습니다. 36절을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시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저렇게 눈물을 흘리실까?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삼 남매에 대한 예수님의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온 가족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처럼 큰 축복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삼 남매가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고,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형제 자매과 가족들이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참빛 가족들이 부모 형제와 더불어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는 축복의 가정과 가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은 슬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희가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과정을 보면
 
사람들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라고 의아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37절을 보면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우리 오라비가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면서 원망섞은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을 알기 때문에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는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이상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든 나사로를 고치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인데 왜 죽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병든 자는 고치셨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사로가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살려주시겠지 그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 까지는 믿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아직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하는 말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무덤 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8-39절을 보면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이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 두셨느냐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또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무덤은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돌문으로 막혀 있는 것을 보시고,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마르다의 이야기는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이제 돌을 옮겨놓고 죽은 시체를 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몇 시간 전에 죽은 것이라면 모를까 이미 사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겠다고 하시는건가?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생각하기에 그건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을 굴에다 장사를 지내니까 죽은지 사흘이 지나도 다시 살릴 수 있는데 땅을 파고 묻으면 다시 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땅에 묻혔어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이슬람에 의해 핍박받는 지역에서 생매장당했던 사람이 살아난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흙에 묻혀서 살 가능성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흙에 묻힌 사람이 죽지 않고 살게 하셨습니다.
 
마르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을 믿으면 나사로가 살아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병자를 고치실 때는 그 사람이나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는 경우들이 있었지만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신 것은 누구의 믿음을 보시고 살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보면서 내가 하는 말들을 믿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나사로야 나오라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고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는
 
아버지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41절을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는 기도하시지 않고 직접 고쳐주셨지만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미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두 번째 기도는 이 일은 그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라는 기도입니다. 42절을 보면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여기에 둘러선 무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아버지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음을 믿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43-44절을 보면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치워지고 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신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누워있던 나사로를 향해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벌떡 일어나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수의를 입은채로 온 몸이 베로 동인 채로 걸어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로 온 몸이 동인채로 힘들게 걸어 나오는 것을 보시고 풀어 놓아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같은 역사를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듯 죽은 거 같았던 우리의 삶이 살아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병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망한 것 같은 사업이 무덤에서 나오듯 회복되고, 삶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무덤에서 나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십니다.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고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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