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7월 16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로마서 8:1-11(신약 18)
 
바울 사도는 롬 7:21-25절 까지에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람은 누구나 두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따르고 믿음으로 의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육체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우리는 위대한 사도라고 말합니다. 평생을 복음과 선교를 위해서 사신 분이고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은 책을 기록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의 내면에는 두 가지 법 즉 두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공존하는 두 개의 마음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마음을 따라서 살아가고 성도들은 영의 마음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7장에서 두 마음이 갈등한다는 말을 하고 8장에서 계속해서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의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찬양 사역자 김용표 목사님이 어느 해 몽골 단기 선교를 가서 내려놓음의 저자인 이용규 선교사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대화 중에 이용규 선교사님이 김용표 목사님에게 “목사님 진짜 선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라고 질문을 해서 김용표 목사님은 “글쎄요, 물질이나. 기도후원, 신실한 동역자가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런데 이용규 선교사님은 “목사님 선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라고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아서 만든 CCM이 “다시 복음 앞에” 라는 찬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의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복음 앞에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영의 생각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영의 생각 즉 복음 안에 살아갈 때 생명과 평안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과 평안이 없는 걱정과 두려움과 염려 속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복음-영의 생각)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다르게 표현하면 영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정죄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죄인으로 규정함. 죄가 있다고 공시적으로 선언함’ 이란 의미입니다.
 
정죄라는 것은 죄가 있다고 법정에서 선포하다는 의미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에게 너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어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정에서 공식적으로 죄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정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사람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이 없다는 것은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영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영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면서 구체적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 고 선포했습니다. 2절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라는 의미와 함께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 있는 분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데 그 성령님은 생명의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예수님 안에 계신 성령님은 오순절날 사도들에게 임했고 오늘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으로 인해서 우리는 정죄함이 없게 되는 것이고 정죄가 아닌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칭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 말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거니와 또 실제로 지키려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보내 우리의 죄를 없앨 희생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죄를 멸하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시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는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아갈 때 즉 복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성령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갈 때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율법을 이룬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열어주신 새로운 길입니다.
 
율법이 아닌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육신이 아닌 영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육신을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영을 따르는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되어 생명에 이르게 되는 반면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결말은 사망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에 대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5-6절을 보면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 사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 했습니다. 먼저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과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누었습니다.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고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고 돈을 잘 벌고 유명해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란 말의 의미는 육신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자란 의미로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려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안 다니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계열로 성전에서 예배를 집전하지만 그들은 영혼이 없다고 믿고 천국도 없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에 잘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고 부자가 되려고 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사두개인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대인 중에는 돈을 위해서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란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고 출세를 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사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즐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즐거움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하는데 세상의 삶이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마귀가 좋아하게 되고, 결국은 마귀와 귀신과 짝이 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가 이끄는대로 살아가게 되고, 마귀가 주는 쾌락과 세상 즐거움에 흠뻑 빠져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8절을 보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즐거움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원수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잘되고 출세하는 것 같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주님 앞에 섰을 상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기뻐하는 것도 누릴 수 있습니다.
 
3.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바울 사도는 육신을 따르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을 따르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영의 생각이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있는 성도 즉 성령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된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 거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자라는 말 보다 성도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단어의 의미로 보면 신자는 믿는 자라는 뜻이라면 성도란 헬라어는 ‘하기오스’인데 이 단어는 거룩하다는 의미이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란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아닌 거룩한 성도가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이 진정한 성도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들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영의 생각이 생명이란 말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해서 살아 있는 자가 되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자가 되었고 죽을 몸인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평안입니다. 바울 사도는 영의 생각이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는데 생명에 대해서는 설명을 했지만 평안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영의 생각은 평안이란 말씀과 관련해서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영의 생각이 평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재앙이 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으며 영의 생각을 하게 되고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입니다. 그리고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의 생각으로 산다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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