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7월 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마태복음 11:25-30(신약 18)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짐이 있고, 어머니의 짐이 있고, 자녀의 짐이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짐이 있고, 사업에서의 짐이 있고, 학교에서의 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 져야 할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걸어가도 힘든데 짐을 지고 간다는 것이 더 힘들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대전에 계시는 목사님들 몇 분과 남이섬을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남이섬을 한 번도 못 가본 분들이 있다고 해서 그럼 남이섬에서 회의를 하자고 해서 남이섬에 같이 갔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8명이 남이섬을 갔는데 모두가 가벼운 복장으로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은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까 남이섬에서 즐길만한 수상 레포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수상스키 같은 것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하고 갈아입을 옷을 담은 가방을 메고 왔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수상 레포츠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혼자 가서 수상스키 타고 오라고 했더니 혼자는 재미가 없다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 스포츠를 즐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걷기 좋은 남이섬에서 천천히 걸어가는데 가방을 메고 온 목사님만 혼자 유독 힘들어 했습니다. 모두가 홀가분하게 가는데 혼자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물론 그렇게 엄청 무거운 짐은 아니었지만 작은 짐이라도 지고 가는 것과 홀가분하게 가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무 짐도 지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길을 가는 우리들이 짐을 짊어지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시는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은혜는
 
1. 아버지의 뜻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점을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아무나 알게 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쉽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어도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숨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5-26절은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짧은 기도를 드리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감추셨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감추셨다는 것은 뜻이 이미 전해졌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란 의미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교만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을 지칭하신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25절을 다시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숨기시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라는 말은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스스로 만족하며 자칭 지혜롭다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인 반면 어린아이들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마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자랑하고, 우리의 생각을 내세우지 말고 어린아이 처럼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신앙으로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을 보면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여기서 이렇게 된 것은 이란 앞에서 말씀하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두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한 젖과 같이 사모하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는 말의 의미는 ‘아버지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아람어식 표현으로 이해할 때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버지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이고,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내려놓아야 할 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감추어졌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한 성도들에게는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주님이 초청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육신의 짐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암송하는 28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원어는 ‘호이 코피온테스’인데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합니다. 무거운 짐진 자의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는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의미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보면 우리의 육체와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지치고 피곤한 상태와 질병에 걸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치료하시고, 가르치시고, 선고하시는 3대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특징적인 사역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기도할 때 우리의 질병이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묶으려는 귀신도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즉 삶의 곤고함과 질병과 지쳐있는 삶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몸이 건강하게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의 지쳐있던 육체가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이 고침을 받아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마음의 짐이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만이 아니라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든 짐을 이야기 한다면 마음의 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힘들면 모든 것이 힘들어집니다. 돈이 많아도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도 마음이 힘들면 즉 마음의 짐을 지고 살면 모든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짐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물론 마음의 짐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포함해서 훨씬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담고 있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주님께 던져버립시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렘 46:27 “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 앞에 모든 걱정과 근심과 염려는 던져버리고 주님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평안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내려 놓아야 할 또 다른 짐은 신앙의 짐(영적인 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서 내 멍에는 내 짐은 이란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신앙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교회 나오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되고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이런저런 직분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에서 담당하는 일들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냥 교회에서 예배만 드릴 때는 행복했는데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봉사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 생활 즉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현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봉사는 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의 짐과 영적인 짐을 나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려고 하면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워지게 됩니다. 주님은 네가 하려고 하지 말고 나에게 맡기고 내가 주는 힘으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봉사와 헌신이 탈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쉼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변에서 서로 짐을 나누어 지면서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3. 쉼을 얻는 방법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마음과 신앙의 짐을 지고 살아갈 때 그 짐으로 인해서 지쳐 쓰러지지 않고 진정한 쉼을 얻는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가 쉼을 얻는 비결은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28절을 다시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마음과 신앙의 짐을 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헤매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서 먼나라로 갔던 아들이 돌아오길 매일 기다리던 아버지같이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 돌아오길 매일 기다리십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짐을 지고 우리 힘으로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쉬게 하겠다는 말씀은 짊어진 짐에서 너를 해방시켜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과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쉼을 얻는 또 다른 비결은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29절을 다시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다고 합니다.
 
때론 사람들이 메기도 하고 동물들이 메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항상 둘이 짝을 지어 메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어미소와 송아지가 같이 메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멍에를 하나의 짐승에게 메게하는데 이스라엘은 항상 둘이 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너의 멍에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의 멍에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짝을 지어 멍에를 멘다는 뜻입니다.
 
내가 혼자 나에게 주어진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때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멍에를 메고 가는 것이기에 우리가 어떤 짐을 가져왔든 육체의 짐이든 마음의 짐이든 신앙생활의 짐이든 우리는 그냥 주님과 멍에를 메고 주님과 발을 맞추어 가면 주님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보폭을 맞추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진정한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멍에를 메기는 했지만 주님의 힘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쉼을 얻는 비결은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을 ‘모방하라’, ‘예수님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 진리를 배우고 진리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고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하신 말씀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육신의 짐과 마음의 짐과 신앙의 짐을 내려놓으라 그리하면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으리라 주님은 요한사도를 통해서 요한3서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들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고 우리의 입으로 선포하겠습니다. 28-30절까지 말씀을 같이 선포하면서 마치겠습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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