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6월 11일 오후 예배)
성 경 : 요한복음 8:1-11(신약 158)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자기가 하면 로멘스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고 남이 하는 것이 잘못이고 죄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흔히 하는 내로남불을 가장 아무렇지도 않고 저지르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엄청난 비판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더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버티는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고대 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이 붙잡혀 온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여자만 잡혀 왔지? 하는 질문입니다.
 
간음이란 상대가 있는 것인데 간음하다 현장에서 여자만 잡아 왔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었다면 당연히 남자도 끌고 와야 되는데 여자만 끌고 왔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아마도 남자는 잽싸게 도망갔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한 짓이 들통이 나고 여자는 잡히는 상황에서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고 같이 짐을 지기보다는 자시만 살겠다고 내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문제는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자는 현장에서 잡혀서 사람들에 의해서 끌려 왔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끌고 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사람은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런 여인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기록한대로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돌로 치라고 말하면 이것은 로마 정부에게 예수가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고 고발할 조건이 되고,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대답해도 고발을 당하고, 저렇게 대답을 해도 고발을 당할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고 사람들이 가책을 느끼고 나자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했다.
7장에서 초막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들이 아랫사람들을 보내서 잡아오라고 했지만 예수님을 잡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전이 예루살렘에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오셨습니다. 이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1-3절까지를 보면
8: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구체적으로 여인의 음행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음행이란 단어가 간음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매춘이란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매춘을 한 것인지 아니면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은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닌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었고 그래서 잡혀서 끌려 왔습니다. 요한은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지 않고 끌려 왔다고 기록했는데 여인은 현장에서 잡힌 것만해도 부끄러운 일인데 사람들 앞에서 끌려 왔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예수님에게 선생은 이 여인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4-5절을 보면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 공동체의 종교적인 법죄와 일반적인 치리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당하고 있고 로마정부에서 파견된 총독이 사법적인 처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 사회는 지역마다 자치적으로 종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 율법에 따라서 처리하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예수님이 이 여인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할 권한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여인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의도하고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의 의도에 대해서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라고 기록했습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함정에서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실 수 있는 것은 돌로 치라고 하던지 치지말라고 하던지 둘 중에 하나 일 것 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 정부의 사법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것으로 조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자가 자기 맘대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 이것은 로마의 사법부를 무시하고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조작을 해서 고발할 수 있습니다.
 
여인을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이것은 유대 종교재판에 회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자가 율법을 거부하고 우리의 종교적인 전통을 무시한 이단이라고 제소하면 산헤드린 공회가 유죄 판결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대답하실 수 있는 것은 이 두 개 뿐 이라고 생각을 했고, 이렇게 대답해도 고발하고 저렇게 대답해도 고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끌고와서 질문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번에는 예수님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여인을 끌고 와서 질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
 
먼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6절을 다시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즉시 대답하지 않으시고 잠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땅에 뭐라고 쓰셨을까? 궁금하게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땅에 무언가를 쓰신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모두가 잠시 마음을 진정하는 시간을 갖게 되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율법을 어긴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 온 상황이라 성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음이 진정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즉시 대답하실 수 있음에도 거기 모인 사람들이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진정한 시간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땅에 쓰시는 동안 무엇을 쓰시나 하면서 보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조금씩 진정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마음이 흥분된 상태에서 급하게 말하고 결정하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지 차분하게 생각하고 마음이 평안한 상태에서 결정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재촉했습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묻기를 마지 하지 아니하는지라는 말은 재촉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웅성웅성 거리는 상황에서 몸을 굽혀 글을 쓰시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흥분된 상태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재촉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대답을 이끌어내서 자신들이 원하는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예수님을 재촉하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땅에 쓰셨습니다. 7절을 다시 보면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예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흥분 상태가 가라앉길 기다리셨고, 사람들이 잠잠한 상태가 되었을 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너를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한 것은 다 그럴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잘못이라기 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은 눈에 잘 들어오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을 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습성을 아시기 때문에 너희는 먼저 너희 자신을 돌아보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먼저 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만큼 나는 죄가 없고 순결한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게 되면 정죄하기 보다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단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예상한대로 대답을 하시면 바로 잡아서 재판에 넘기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나갔습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래도 그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양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뜨끔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하던 자신을 돌아보니까 저 여인만큼이든 아니든 자신은 죄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먼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젊은 사람들도 하나씩 자리를 떴습니다. 그 여인을 잡아서 끌고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떠났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같은 상황이라면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보다는 돌을 던지는 사람이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돌을 던지는 것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너 자신을 돌아보라 네 눈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떠나가고 없는 것을 보신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고발하고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10절에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같이 죄를 지은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음행이라는 죄명으로 사람들 앞에 끌려온 상황에서 곳곳에서 수군거리고 욕을 합니다.
 
여인은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을까요? 아마도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여인을 위로하거나 그럴 수도 있지 다음부터 그런짓 하지 마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음행의 죄를 짓기는 했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망신도 당하고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은 위로해 주시고 감싸주신 것입니다.
 
너를 고발하고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은 여인에게 이제는 안심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여인에게 너를 고발하고 정죄하던 자들은 다 갔으니 이제 마음을 편하게 하라고 위로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돌을 들어 던지는 역할이 아닌 다가가서 위로해 주고 감싸주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위로하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1절을 보면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너를 고발하고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자 여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에게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인이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이해하시고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한가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지만 다시 죄를 지으면 정죄를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죄를 따르지 말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서로 용서하고 감싸주는 공동체로 참빛교회가 굳게 세워져 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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