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게 하려 함이라(5월 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베드로 전서 2:1-10(신약 378)
 
금 년 어린이 날은 제101회라고 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어린이 날이 100년 전에 제정됐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날이 지났고 교회에서는 오늘을 어린이 주일로 지킵니다.
 
해마다 어린이 주일을 4월 마지막 주에 해야 하는 5월 첫 주에 해야 하는 고민하곤 합니다.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간격이 좁다 보니 어버이 주일 같은 어린이 주일을 지키게 되는 경우들이 많아서 일부 교회에서는 4월 마지막 주에 어린이 주일을 지키기도 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류현이와 시우를 보내주셔서 한동안 어린이 보기 힘들었던 참빛 교회에도 어린이가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직 청소년인 세준이와 세경이 그리고 재윤이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교회도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교회의 약 70% 정도의 교회가 주일학교가 모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한국교회가 오늘과 같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90년대 초까지 아무리 작은 교회도 주일학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어린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두 울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뿐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고 아이들이 많아져야 하는데 우리가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나라가 되고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어린이는 자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자라지 않는 어린이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우리는 자라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가 귀엽고 이쁘고 사랑스럽지만 그대로 자라야 합니다.
 
점점 자라서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야 하듯 우리의 신앙으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자라가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자라가게 하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자라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자라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가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여기 언급된 것들을 버러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버려야 할 옛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 중에 모든 악독이 있습니다. 여기서 악독이란 말은 단순히 악하게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모든 악들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또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다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모든 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모든 기만을 버려야 합니다. 기만은 ‘미끼로 끌어들이다’ 라는 의미의 ‘델로’에서 유래한 단어로 3절의 ‘순전’과 반대되는 ‘속임’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에는 외식이 있습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르고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외식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교만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데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시기’라는 단어도 자기 우월감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인이 잘 되는 것을 방해하는 죄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즉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로 인해서 결국은 비방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는 이런 것과 관련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은혜를 나누는 말을 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길입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이 있었고 이제는 우리가 어떤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했습니다. 2절을 보면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가감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 즉 막 태어난 아기들에게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 어른들 생각에 맛이 없을지 모르니까 꿀을 좀 넣고 소금도 살짝 치고 해서 먹이지 않습니다.
 
갓난아기들은 어머니의 젖을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이런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글 중에
 
마이클 웰즈 목사님이 자주 한 예화인데 바쁘게 온 세상을 돌며 ‘그리스도인이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인기 강사가 있었습니다. 훗날 이 강사가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많은 성도들이 알아보고는 강의를 요청했습니다. 강사는 그날부터 하루에 한 번씩 천국의 성도들을 위해 특강을 했고 많은 천국 성도들이 몰려와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맨 앞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사의 강의를 주의 깊게 들을 뿐 아니라 열심히 필기까지 하셨습니다. 강사는 강의를 마치고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얼 그리 적고 계시는지요? 저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반으로 강의를 만든 것 뿐인데요?”
 
그러자 예수님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셨다고 합니다.“그래? 나는 전부 처음 듣는 소린데?”
 
설교자들이 성경을 전한다고 하면서 성경외에 다른 것들을 많이 가미한 것을 지적하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순수한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한편 ‘사모하라’의 헬라어 ‘에피포데사테’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이 성장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말씀을 갈망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갓난아기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사모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갓난아기들처럼 순전한 젖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인자하심을 맛 본다’ 라는 것은 갓난아이가 젖의 맛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맛을 아는 것에서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한 것이 인자하심을 맛본 신앙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기 위해 말씀을 더욱 사모하여 그 능력 안에서 성숙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자하심을 맛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비결입니다.
 
2. 거룩한 제사장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 버릴 것과 갓난아기들 같이 신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성도가 아닌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으로 가라가기 위해서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인들의 행위는 예수님을 버린 돌로 여긴 것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는데 베드로 사도는 버린 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 없다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보배로우신 산 돌로 예수님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보배로운’의 헬라어 ‘엔티몬’은 문자적으로 ‘존경을 받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순종으로 인해 배척당하셨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게 하셨습니다. ‘산돌’은 실제로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릿돌’(마 21:42), ‘생명수의 반석’(고전 10:4), ‘기초석’(고전 3:11), ‘심판의 돌’(단 2:34)로 표현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 성도라는 이제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머릿돌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령한 집인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5절을 보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또한 교회의 기초석 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위에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서로 연합하여 교회를 세워간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세워가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표현을 만인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레위 가문의 제사장만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오신 다음에는 모든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제사장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으로 세워져 갈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6-8절까지를 보면
2: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2: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대인들에게 버림 받으신 예수님은 모퉁잇돌이 되어 교회를 세워가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로 세워져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를 드리고 살아갈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오른손으로 높이 세우사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견고한 반석 위에 서게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심판의 돌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똑같은 돌이지만 성도들에게는 교회의 머릿돌이 되는가 하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고 심판하는 돌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으로 세워져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인 우리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시고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신정정치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신 것은 왕이면서 제사장으로 나라를 이끌고 하나님의 대언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왕의 특권과 축복’ 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우리가 이렇게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은 어둠에 있던 우리들을 불러내셔서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있던 우리들을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기이한(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어두운 데서 불러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덕이란 단어는 탁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헤메이던 인생들을 놀라운 빛으로 인도하셔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셨는데 이것은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탁월하고 놀라운 것으로 세상 그 누구도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아름다운 덕은 탁월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령한 제사인 예베를 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랍고 탁월한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였던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긍휼을 얻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으므로 긍휼 즉 사랑을 받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입을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져서 그의 기이한 덕을 전하며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멈춘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참빛 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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