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 예언의 성취(4월 23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누가복음 24:13-35(신약 140)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컸던 제자들과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대 평범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란 기대를 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런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계속해서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상황이 발생하자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실망을 넘어 절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절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큰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면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과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벗어나기 힘든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상황이 단 하루 이틀 만에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잡히시고 몇 달 감옥에 계시다가 재판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밤 중에 잡히시고 그 다음 날 바로 십자가 처형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그런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격이 너무나 커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큰 충격은 다른 일들을 생각도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목사님이 자기가 잘 아는 정형외과에 미국에서 하는 신기술을 도입해서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 방법을 사용한다면서 저보고 그 정형외과에 한 번 가보라고 해서 그 방법이 어떤 방법이냐고 물었더니 통증을 심하게 느끼는 환자에게 더 큰 통증을 경험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통증보다 훨씬 더 큰 통증을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웬만한 통증은 통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큰 통증으로 통증을 극복하게 하는 치료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무덤덤하고 진짜 부활하셨나 하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구약에 예언된 말씀들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는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에게 듣고 배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복음 – 예언의 성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1.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은 누가복음처럼 자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라고 기록했습니다.
 
두 제자가 시골로 내려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두 제자가 가는 곳이 엠마오라고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간단하게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을 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눈이 가리어져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13-16절을 보면
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못 알아봤다고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이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으시기 전의 모습이 아닌 부활 이후에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이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처럼 보이셨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완전히 변화된 부활체로 나타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우리가 부활에 참여하게 될 때 이 세상에서 살던 지금의 몸과 다른 부활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속량하실 분이라고 바랐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17-21절까지를 보면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24: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시는 길이었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 채로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물었을 때 슬픈 기색을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은 며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시냐고 물으면서 자신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말과 일에 능하신 분이신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분으로 기대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 시켜 주시거나 절망의 시대에 절망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기대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속량이란 단어는 값을 지불하고 되찾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값을 지불하고 건져주실 분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믿고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말한 다음에 그러나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22-24절을 보면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그들이 엠마오로 출발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소문을 들었는데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는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전해준 천사들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이 무덤에 가서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을 보고 온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님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왔다고 전하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말을 확실히 믿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망한 채로 슬픈 기색을 하면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들의 이야기와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셨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언대로(성경대로) 이루어졌다.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분으로 기대했던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렇게도 미련한 자들이냐! 너희는 예언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이 그렇게도 믿어지지가 않느냐!”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란 말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느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직접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 땅에 와서 성경의 예언대로 모든 사역을 했는데 너희는 마음이 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즉 예언의 말씀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위해서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져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말씀을 믿고 깨닫게 하시도록 성령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님은 계속해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영광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을 보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죽으신 것을 보았기에 마음에 낙심과 슬픔이 가득한 채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 즉 십자가에 죽는 고난을 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신 것으로 죽음에 매여 있지 않고 다시 살아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미 성경에 예언 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깨닫고 믿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모든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27절을 보면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모세가 기록한 성경 즉 모세오경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에 기록된 즉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고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란 말은 개역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번역 했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복음이신데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즉 복음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이시고 복음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 속에서 마음이 뜨거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슬픔에 쌓였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서서히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28-31절까지를 보면
24: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4: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길을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지만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이신 줄 못 알아 봤습니다. 그러나 함께 길을 가면서 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시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모시고,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실 때 축사를 하시고 떼어주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영의 눈이 어두울 때는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영의 눈이 가리어져 있을 때는 바른길을 가지 못하고 헤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감겨 있던 영의 눈이 열려야 하고 우리의 영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것들이 벗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눈은 근심으로 가려지고, 욕심으로 가려지고, 불신앙으로 가려지고,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가려집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눈이 열리는 과정에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32절을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뜨거웠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뜨거운 감동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즉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마음을 뜨겁게 해 주었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감동을 주고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이 감동이 되고 마음으로부터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는 것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33-35절까지를 보면
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제자들은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실망한 채로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을 만나고 제자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제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날 우연히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오실 것과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하게 하셨고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예수님이고 복음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의 예언은 성취되고 성경대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믿고 그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의 눈이 열려서 하늘의 비전을 보고 살아가고 하늘의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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