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야 나오라(3월 26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요한복음 11:17-44(신약 165)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패딩같이 두툼한 옷을 입었는데 어느새 개나리가 피고 벚꽃이 피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나뭇가지에서 파란 잎들이 돋아나고 풀들이 올라오고 꽃들이 피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봄은 부활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긴 추위의 터널을 지내고 나면 새봄이 오듯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며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면서 기다리는 것은 부활의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기에 사순절을 부활에 대한 기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은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베다니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삼 남매가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 남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갑자기 병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어서 죽어가는 상황이 되자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보고 사람을 보내서 우리 오라버니가 병들었습니다. 라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실로암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그렇게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나사로가 병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길게 잡았는데 전체적인 앞부분의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나누지 않고 32절부터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 된 것을 아셨지만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눈을 열어주셔서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들어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신 말씀을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신 것은 불쌍히 여기심에서 시작된 기적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불쌍히 여기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것도 불쌍히 여기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긍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인애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결과적으로 사랑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의 기록에 보면 병자를 고쳐주실 때 불쌍히 여기서 고쳐주셨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의 가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가족을 불쌍히 여기셨는데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여기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1절을 보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절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찍 오셨더라면 그래서 우리 오라비 나사로가 죽기 전에 이곳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두 여인은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살려주셨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담긴 표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전했는데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께서 오시기만 했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인데 예수님 왜 그 때 안 오셨나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런 고백은 우리가 늘 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때 내가 기도하는대로 응답해 주셨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인데 왜 내 기도에 응답을 안 해주셨나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이면 똑같았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 구절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리아의 뒤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격한 감정이 들면서 몹시 아프셨습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예수께서는 마리아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마리아와 같이 통곡하는 것을 보시자 애처로운 생각에 매우 침통해하시며” 라고 번역했습니다.
 
마리아 뿐만 아니라 나사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상을 하러 온 사람들이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애처로운 마음에 침통해 하셨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은 매우 아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는 자들을 보면 함께 울어줄 수 있어야 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과 같이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즐거워하고 아마도 이런 것을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와 아픔과 즐거움을 함께 느끼시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4-36절까지를 보면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예수님은 마리아와 문상객들이 우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고 또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눈물을 흘리시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나사로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젊은 나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직 더 살아서 일할 수 있는 나이였을 것인데 병들어 세상을 떠난 상황이기에 마르다와 마리아도 슬퍼하고 사람들도 슬퍼했고 예수님도 그들을 보시면서 눈물 흘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우리의 눈물을 보시면서 함께 눈물 흘려 주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눈물 흘려주십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은 같이 눈물 흘리신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슬픈 일이었지만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34절을 다시 보면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고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에 대해서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고 나사로를 살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느냐? 즉 어디에 장사를 지냈느냐? 그의 무덤이 어디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가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던 것처럼 고통 중에 있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절망의 자리에 죽음의 자리에 친히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십니다.
 
무덤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8-39절을 보면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무덤에 묻혀있던 나사로를 깨우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먼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다고 해도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지 않으면 혼자서 무덤을 열고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무덤에서 나오려면 먼저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나사로가 살아서 나올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가 할 일을 무덤을 가로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은 일입니다. 우리가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을 옮기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불신앙의 돌을 옮겨놓아야 합니다. 죽음의 문을 굳게 막고 있는 의심과 원망과 불평과 불순종의 돌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돌을 옮겨놓을 때 부활의 기적, 다시 회복되는 기적과 절망이 희망이 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4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한 전제 조건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할 때 마르다가 이미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는데 돌을 옮겨서 뭘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죽은지 나흘이나 돼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그리고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지금 필요한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돼서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습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마르다에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볼 때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네가 믿으면 기적을 경험하게 되고 네가 믿으면 하늘의 복을 누릴 것이다.
 
3.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깨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주셨고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따라 해야 할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41절을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은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직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즉 내 기도가 이미 응답 됨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미 기도가 응답 됨을 믿고 감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계속되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2절을 보면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기적의 목적이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내 말을 들어주심을 내가 알았습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는 것은 이 사람들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도 사람들이 우리가 응답받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어서 우리의 가족과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신 예수님은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43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 선포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포를 통해서 귀신을 몰아내셨고, 병자를 고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삶을 향해서 선포하십니다. 슬퍼하지 말고 기쁨의 찬양을 불러라,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나오라, 질병의 고통에서 나오라, 외로움과 고독함에서 나오라, 물질적 가난에서 나오라,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선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과 절망과 슬픔과 가난과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아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44절을 보면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수의로 온 몸이 둘러 쌓여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사로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풀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그를 수의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부활의 은총에 참여한 성도이지만 우리를 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것들을 풀어 다니게 하실 줄 믿습니다. 모든 묶은 것들이 풀려 지고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는 참빛교회 모든 가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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