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3월 1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요한복음 9:1-12(신약 161)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을 고친다고 할 때 살아가다가 질병에 걸렸다거나 장애를 입었다거나 한 경우는 그래도 고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에는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질병을 고치시는 분이신데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도 장애가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분이 창조주라고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계셨고 세상을 친히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못 고칠 병이 없으십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고치시고 중도에 장애를 입은 사람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역대하 32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하자 기혼샘에서 물을 연결하여 앗수르의 군대가 물을 공급받지 못하게 하는 공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물 저장고로 만든 곳이 실로암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신 다음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매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기적을 경험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눈을 뜬 것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 11절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나면서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가 원래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시대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대부분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은 구걸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본문에 나타난 시각 장애인도 역시 구걸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 부터 구걸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시각장애인을 보면서 제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2절을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은 이 사람이 이렇게 태어난 이유가 죄가 아닐까요? 라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이렇게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라고 질문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인가요?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의 죄라면 아기가 태중에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맹인으로 태어난 걸까? 이렇게 생각했다기보다 아이가 태중에서 죄를 짓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모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이가 장애를 가진 채로 태어났을까요? 이런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믿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계속 겪으면 죄 때문에 그런 문제와 어려움이 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문화적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지역의 문화적 고정관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고정관념은 팔자가 그렇다거나, 궁합이 안 좋다거나, 이런 식의 문화적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분들도 이런 표현을 흔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표현들 팔자니 궁합이니, 무슨 띠는 그렇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들은 미신이고 비성격적인 표현들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죄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문화적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또한 모든 것이 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분명히 사망입니다. 죄의 결과는 질병이나 환난의 원인 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 장애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시각 장애를 가진 채로 태어나게 하셨고,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많은 시련의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때론 긴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긴 시련의 시간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참고 인내하면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위해 복되게 사용하시고,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제자들은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요? 그 부모의 죄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 사람의 죄 때문인가요? 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어두움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빛으로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빛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빛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기 때문에 영적 시각 장애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때가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지금은 낮이기 때문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나서부터는 공생애와 같은 사역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즉 예수님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은 어둠의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낮의 시간 즉 빛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의 시간은 낮에 해당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어둠을 따라가지 말고 빛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4절을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낮이 지나고 밤이 오면 일할 수 없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밤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고 밤이 더 바쁜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밤에 일한다는 것은 빛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밤에 일할 수 있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밤에도 일할 수 있는 전기를 사용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낮인가 밤인가가 아니라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빛이 없는 곳은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어둠과 밤입니다. 우리는 밤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때까지 빛의 시간 즉 낮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둠이 오기 전에 빛의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 우리에게 주어진 빛의 시간이 끝날지 모릅니다.
 
어둠의 시간이 오기 전 우리가 일할 수 없는 시간이 오기 전까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어둠의 세상에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으로 절망과 좌절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5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빛이 없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의 삶은 어둠입니다. 그런 시작 장애인에게 예수님은 빛을 주시기 원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어둠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보게 되고, 못 걷던 사람이 걷게 되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일들이 고침을 받아 회복되고, 죄책감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통해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있는 동안에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눅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즉 그들이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3.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빛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나면서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셨는데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6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께서 손으로 만져주셔서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말씀만으로 고쳐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각 장애인에게는 침을 뱉으셔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왜 물을 좀 가져오라고 하셔서 진흙을 이기시지 더럽게 침을 뱉으셔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주셨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에 대해서 의미를 찾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순간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 시각 장애인에게 치료의 과정에 필요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각 장애인의 눈이 치료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그 자리에서 즉시 고쳐주지 않으시고 과정을 거치게 하신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적절하게 하신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오직 하나의 방법으로 치료하시거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그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 진흙을 눈에 바르신 다음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암이 눈을 치료하는 약 성분이 있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치료받는 과정에서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고 실로암까지 가서 씻는 순종의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7-11절 까지를 보면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9: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9: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실로암에 씻었더니 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던 그의 눈이 열려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나타나자 그를 알던 사람들이 갑자기 눈을 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기 때문에 구걸을 하던 사람인거 같은데 아닌가 다른 사람인가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눈이 어떻게 뜨게 되었고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기로 내가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암이 기적의 연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로암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씻어야 합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의지해서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 마음의 눈과 영의 눈을 씻을 때 마음과 영의 눈이 열려 말씀을 깨닫게 되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환상 즉 비전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순종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늘의 눈이 열리듯 기적을 경험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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