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친히 본 자라(2월 19일 주일 오전예배 설교)
베드로 후서 1:12-21(신약 384)
 
오늘은 주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되심을 기념하는 주님 산상변모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 아니라 3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이 세 제자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데리고 다니셨는데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도 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 변화 산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곳에서 친히 변화된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변화 산의 사건 외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로 비판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직접 경험하고 본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는 건국 신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단군신화가 있어서 단군이 우리나를 세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단군의 이야기를 말할 때 신화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강화도 마니산에 가면 단군을 신으로 섬기는 제단이 있고 개천절에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1910년 경부터 단군교라는 종교도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있고 홍익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가 전국에 단군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단군신화와는 달리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성육신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시대에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사역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친히 본 사람들이라로 증언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는 친히 본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쓰면서 이 편지를 써서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이 글을 읽고 너희가 배우고 듣고 알고 있는 것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마음에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억력이 좋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잊혀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들 또는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 즉 잊혀지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이미 진리에 서 있으나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진리에 서 있다는 말은 진리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굳게 서 있기 때문에 거짓된 가르침의 위험에 쉽게 넘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이 글을 읽는 성도들이 사도적 진리를 바탕으로 굳게 선 그리스도인들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너희가 사도들에게 교육을 받아서 진리 안에서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항상 생각나게 즉 사도들이 가르치는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들을 잊지 않고 생각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던 성도들도 시련과 역경이 오게 되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내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베드로 사도가 말한 이 장막은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목민 생활을 할 때 천막을 치고 생활한 것처럼 우리 육체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장막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장막 즉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 부지런히 너희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서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하려 한다고 말하는데 일깨우다는 말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하다는 의미와 각성시키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할 수 있는 한 너희가 영적으로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가 되게 하고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 올 때 각성시켜서 견고한 믿음 위에 서게 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고백은 내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너희에게 진리를 전하고 내가 너희에게 전한 진리가 항상 생각나서 항상 깨어 있는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도록 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장막 즉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복음의 전달자가 되고 진리를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도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14-15절을 보면
1: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장막을 벗어날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육신이 잠을 자게 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이 주님의 부름을 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표현을 했는데 베드로 사도 역시 주님께서 육신의 장막을 벗을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머지 않아서 육신을 벗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열심히 너희에게 진리를 전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내가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떠난 후에라도 즉 내가 죽은 뒤에라도 내가 너희에게 전하고 가르친 것이 생각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자신에게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배운 말씀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잘 지키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한 진리의 말씀이 계속해서 너희 마음에 기억되고 생각나서 진리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길 바란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
15절까지 베드로 사도가 전한 말씀들이 마음에 생각나길 원한다고 말한 다음에 내가 너희에게 전하려고 하는 즉 너희가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강림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여기서 능력과 강림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능력으로 임재하셔서 심판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능력과 강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은 초림과 공생애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들을 포함해서 마지막 때 다시 오시는 재림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은 어떤 사람들이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의 이야기를 신화적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분들이 신화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들로 사람들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신화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책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종말의 때에 반드시 일어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교묘하게 만들어 낸 이야기 아니라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 등 사도들이 전하여 준 교훈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친히 보았음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위엄’은 신적인 권위와 장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목격한 예수의 변화산상 사건을 말한 것 입니다. ‘친히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타이’는 신비 종교들에서 사용된 전문 용어로서 가장 높은 경지의 신비를 경험하였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와 어휘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위엄을 변화산에서 우리가 직접 보았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변화산의 그리스도의 위엄에 대해서 마 17:2-3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이어서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17-18절을 보면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하늘에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린 것은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마 3:17절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침례 받으신 예수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베드로 사도는 두 번의 사건 중에서 변화산의 이야기를 하면서 홀연히 빛난 구름이 덮을 때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성자 예수님이심을 증언하는 것이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신다고 들려주셨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은 교묘하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한 예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9절을 보면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확실한 예언이란 말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모든 예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됨으로 인해서 확실한 예언으로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되었기에 이제는 어둠에 잠겼던 마음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을 밝힌 등불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말씀이고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의 할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말했습니다. 20절을 보면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사사로이 풀 것’ 의 헬라어 ‘이디아스 에필뤼세오스’에 대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1)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사람이 개인적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2)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예언자 자신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즉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곧 성경의 모든 예언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한다든지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라는 관점으로 해석을 하는 것과 같이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강조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단들을 경고하는 것이고 교회가 이단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말씀을 자신들 마음대로 해석해서 왜곡시키는 것으로 베드로 사도의 표현으로 사사로이 푸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말하고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도 있고 룻의 개인적인 이야기 같이 보이는 내용도 있고 아가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은 특별한 의미가 담긴 내용들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기록한 것이고 그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진리 안에 살아가야한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오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셨고 다시 오실 재림의 왕이시다.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갈 때 말씀이 현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 붙잡고 하늘의 복을 누리는 참빛 가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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