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2월 5일 주일 오전예배 설교)
마태복음 5:13-20(신약 6)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론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율법을 안 지켜도 됩니까? 율법의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는 복음을 받았으니까 율법을 따르지 않고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의 조항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했다면 이제는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결과적으로 율법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22:37-40절까지에서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의 조항들이 있지만 모든 율법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모든 말씀들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과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다는 의미에서 산상수훈이라고 하고 또는 산상보훈이라고 하는데 산상수훈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모든 성도들이 지켜야 할 생활지침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먼저 여덟 가지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3-20절 까지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절부터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구체적인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소금과 빛이 되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과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 있어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소금과 빛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맛을 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3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성경에서 소금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소금 언약이란 표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소금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금은 영원히 변하지 않듯 우리의 믿음과 세상을 향한 삶의 모습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변덕이 죽 꿇듯한다. 는 우리 표현이 있고 하루에 열두번도 더 변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소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짠맛을 내는 것입니다. 음식에 소금이 적당하게 들어가야 맛이 납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도 소금이 안 들어가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서 소금을 안 넣거나 아주 적은 소량의 소금만을 사용하는 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소금이 없는 음식은 음식의 맛이 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가는 영적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음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갈 맛이 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맛을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말을 통해서 맛을 내는 것입니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이 중요한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듯 우리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게 해야 하고, 우리가 하는 말이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하는 말 중에 예수쟁이들은 말을 잘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 같은 말을 하는 참빛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착한 행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4-16절까지를 보면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소금은 우리가 하는 말을 통해서 맛을 내는 즉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빛을 비추는 삶은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삶이어야 하는데 빛이 된다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은 숨어지내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숨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빛으로 나타나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으로 나타나는 것은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16절을 보면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말은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하고 삶은 착한 행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삶이란 결과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16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란 결과적으로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살아가는 것을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과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2.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소금과 빛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줄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율법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시고 죄에서 자유를 주셨기에 복음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율법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 처분하고 복음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라고 말함으로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서한 것을 분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를 따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복음을 가로막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늠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17절을 다시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불완전한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은 사랑으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삶으로 적용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규정에 따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판단과 정죄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1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기에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율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취되는 것입니다.
 
3. 천국에서 큰 사람
예수님은 율법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면서 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에 조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작은 자이고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에 대해서
 
먼저 천국에서 작은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 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대해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분하고 어떤 것은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같은 것이지 크고 작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어서 천국에서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천국에서 작은 자는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천국에 큰 자는 모든 말씀을 지키고 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말로 은혜를 나누고 착한 행실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과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의가 종교인들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의 즉 사랑을 훨씬 더 잘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 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담도 있는 진정한 의미의 율법의 정신은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고 외형적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진정한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보다 우월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섬기면서 누구에게나 은혜의 말을 전하고 착함을 실천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참빛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변하지 않는 소금이 되고,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빛이 되어 주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고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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