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한 베드로(12월 11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14:66-72(신약 82)
 
스테이시 크래머라는 여성은 어느 날 몸이 좀 안 좋아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결과를 들고 나와 그녀에게 뇌종양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수술까지 힘들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자기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가족과 친구들은 먼 길도 마다 않고 찾아와 위로해주고 함께 옛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게다가 내일을 알 수 없기에 오늘만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정말로 행복했기에 그녀는 마침내 뇌종양을 하늘이 주신 선물로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매일을 선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도중 통증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5개월이 지난 뒤에 다시 검사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종양이 깨끗이 사라져 완치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오늘 하루를 즐기는 삶’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고, 지식 컨퍼런스인 TED에서도 강연을 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행복하고 항상 즐겁고,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힘들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고통스런 일도 있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감사로 받고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희망과 은혜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대림의 계절에 하루하루를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로 제사 드리며 즐겁게 살아갑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는 가운데 한 밤 중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도당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부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이 알아보고 예수님을 따라는 자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저주하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새벽이 다가오자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마태복음은 통곡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통곡한 베드로”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 앞부분에서부터 본문까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성급한 베드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이 임한 다음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는 지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 제자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이지만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에 기록된 베드로의 이야기를 보면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장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앞부분인 27-29절까지를 보면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예수님은 만찬 석상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3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31절에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면서 장담을 했습니다. 다 주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베드로 같이 장담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베드로처럼 장담할 때가 있습니다.
 
성급하게 행동하는 베드로는 칼로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47절에 보면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공관복음에는 귀를 잘린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말고라고 소개했습니다. 요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말고라는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지시를 받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자 베드로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말고의 귀는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베어 졌고 땅에 떨어졌습니다.
 
성급한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8:11절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 26:52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던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말고의 귀를 떨어뜨리자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칼이 상대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나를 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급한 신앙이 아니라 항상 깊이 묵상하고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예수님 앞에서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베드로는 감람산에서 말고의 귀를 칼로 베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잡히시고 끌려가시게 되자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곳으로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도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간 사람은 요한 사도일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고 요한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요한일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사도와 함께 들어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부인할 때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고 말했습니다. 66-68절까지를 보면
14: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14: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14: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말고의 귀를 자른 용기는 간데없고 비겁해진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 요한과 함께 들어간 다음에는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한 밤중이기 때문에 뜰에는 모닥불을 피워놓았는데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여종이 와서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비굴하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그리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아랫뜰에서 불을 쬐고 있다가 여종이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자 그 말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고 말하고는 윗 뜰로 갔습니다.
 
그런데 윗 뜰에 있던 여종이 너도 그 도당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69절에 보면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마가는 첫 번째 말한 여종과 두 번째 말한 여종이 같은 사람인 것처럼 기록했는데 마태복음은 다른 여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단순히 부인했다고 기록한 반면 마태는 맹세하고 부인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마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처음에는 나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가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부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정도가 점점 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부인할 때는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70-71절을 보면
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저주하다는 단어의 헬라어는 ἀναθεματίζω(아나데마티조)인데 이 단어는 저주하다는 의미와 함께 어떤 일을 하기로 굳게 작정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한 내용에서 맹세하다는 단어가 아나데마티조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주란 단순히 모른다는 정도를 넘어서 강력한 부정과 함께 맹세를 포함한 저주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3. 베드로가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을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통곡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닭이 울었습니다. 72절을 보면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공관복음에 닭이 울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만 기록을 했는데 마가복음에는 닭이 두 번째 울었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닭이 첫 번째 운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두 번째 울었다고만 기록을 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그냥 닭이 울었다고만 기록을 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68절에 닭이 울었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두 번째 울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부인했을 때 닭이 첫 번째로 울었다고 기록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쳤는데 갑작스런 상황으로 인해서 위축이 되고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했는데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듣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72절을 다시 보면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예수님은 유월절 최후 만찬을 나누고 감람산으로 가시는 길에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내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그 때 말씀하신 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 머리에 아차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누가는 닭이 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눅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있는 곳으로 얼굴을 향하셨습니다. 순간적으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자신만만했던 베드로였고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못하는 순간 슬픈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그 눈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멀어서 눈물이 담긴 주님의 눈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주님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대림의 계절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이 슬픈 눈이 되지 않고 기쁨의 눈이 되도록 우리를 돌아보면서 대림절을 보냅시다.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71절을 다시 보면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눅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주님이 눈이 마주치게 되자 자신이 장담했던 일이 무너지고 자신이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도 심히 통곡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지난 3년간 자신이 따랐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른 자신의 약한 모습을 깨닫고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통곡은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이끌어간 통곡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곡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탄의 계절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새롭게 변화된 성도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가정을 이끌어 가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영적 리도로 세워져가는 참빛 가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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