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더냐(11월 27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14:32-42(신약 80)
 
벌써 성탄 장식을 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네요. 올해는 전보다 조금 일찍 성탄 장식을 시작한 것 같네요. 아마도 코로나로 인해서 힘든 시간들을 보내서 성탄 분위기를 일찍 내고 싶은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의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는데 지난번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부어드린 사건을 나누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내 장례를 위한 준비라고 하신 반면 가룟 유다는 쓸데없는 낭비라고 했습니다. 같은 일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정반대로 평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말씀으로 은혜를 주신 분이신 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돈궤를 도둑질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말씀을 듣고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향유 사건 이후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월절 만찬을 나누신 다음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안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조금 나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참 동안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와서 보니 제자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깨우시면서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말씀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내려오셔서 제자들을 보시길 세 번 하시고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말씀하시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전에도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하신 말씀을 나누었는데 오후에도 자지 말고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겟세마네에 오르신 예수님
예수님은 마지막 사역의 때가 다가오신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른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다음 날이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아시기에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와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실 것을 아시고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떡을 가지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고 잔을 가지시고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찬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몸과 살과 피를 내어주심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곧 잡히실 것을 아시고 잡히시기 전에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고난으로 인하여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표현을 하시면서 기도하시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올라가셨습니다. 32절을 보면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날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 하시던 대로 기도하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에처럼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 다음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잡히시고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셨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고 혼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할 일들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황을 정확하게는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 무리로 나누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이것에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더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세 제자들과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33절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공동번역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쉬운 성경들은 대부분 놀라시며를 번민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헬라어에서 놀라다는 단어의 의미는 놀라고 두려워하다는 뜻을 답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오르시면서 인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을 비롯해서 쉬운 번역본들은 공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슬퍼하사의 헬라어의 의미는 괴로워하다. 고민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번민에 싸여’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조금 더 올라가시면서 두려움과 괴로움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십자가 사건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끼시면서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완전한 인간을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느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보면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께서 그 때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드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에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기 있으라,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서 쉬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곳에서 있으라고 하는 말은 나처럼 기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요18:2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이곳은 가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오시는 곳이었고 그래서 가룟유다도 그곳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2.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안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을 두 곳에 남겨두시고 혼자 더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에 대해서 마가는
 
이때가 지나가기를 구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35절을 보면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은 할 수만 있으면 이란 의미입니다.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마지막 사역을 앞두시고 번민과 두려움을 느끼시면서 기도하셨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할 수 있으면 이때가 즉 고난받으실 일들이 지나가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오신 완전한 인간이시기에 앞으로 있을 고난의 상황에 대해서 인간적인 두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는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뭐가 두렵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맡겨라.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믿음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입으신 예수님도 두려움을 느끼시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도 아십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고통을 목전에 두고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절망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기는 것은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공포를 느끼며 두려움 속에서 기도한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포와 두려움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거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나타나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계속되는 간절한 기도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36절 중간 부분을 보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이때가 즉 이 상항이 할 수만 있으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다음에 계속해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시면서 “아빠 아버지여”라고 외치셨습니다.
 
아빠라는 단어는 압바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바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람에서 압바(abba)는 원래 그에 동등한 여성 명사 임마처럼 유아 언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어린애가 젖을 떼게 되면 그 아이는 압바(아빠)와 임마(엄마)라고 말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엄마라고 하는데 아람어는 비슷하게 임마라고 하고 우리가 아빠 하는데 아람어는 압바라고 합니다.
 
아빠 즉 압바라는 단어는 아버지를 다정하게 부르는 표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를 향해서 아빠라고 부르시면서 아빠는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을 지나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아빠에게 다가가서 친밀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하듯 아빠에게 하듯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잔이 지나가기를 위해서 기도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36절 뒷 부분을 보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은 곧 당한 고난의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때가 지나가게 하실 수 있으면 지나가게 해 주시고, 모든 것이 가능하신 아빠께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지만 기도의 결론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즉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즉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결론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기도는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예수님은 고난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잠시 쉬시면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기도해 주기를 바랬는데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와보니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든 제자들 그 중에서도 베드로를 향해서 시몬아 자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7절을 보면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루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시중을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월절이기 때문에 유월절을 위해서 준비하고 저녁 만찬까지 하고 뒷정리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제자들은 피곤한 몸으로 기도하려니 아무리 애를 써도 피곤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금요일 밤에 기도하려 교회 와서 기도하려고 할 때 한 주간 열심히 일을 하고, 받은 스트레스도 있고 해서 기도 해야 되는데 졸거나 자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기도 하고 뭔간 긴박한 일이 곧 일어날 것 같다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처럼 피곤한 몸으로 겟세마네 왔다고 예수님께서 간절히 피가 땀이 되도록 기도할 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몬아 자느냐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 말씀은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들어 있던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38절을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과 답답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몇 시간 뒤에 일어날 일과 그 후에 있을 일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잡히셔서 대제사장에게 재판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여러 날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루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잡히시고 재판을 받아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처형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환난과 어려움이 올 때 그것을 이길 힘은 그 일이 있기 전에 늘 기도하던 기도의 힘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합시다. 늘 기도하면 시험이 와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제자들이 육체적으로 피곤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도 육신이 약하도다. 너희들도 지금 기도하게 싶은데 몸이 지쳐서 피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지쳐있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은 세 번을 기도하고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피곤함에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시고,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말씀하셨습니다. 39-42절까지를 보면
14: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14: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14: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한 것을 아시고 세 번째 오셔서는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만 되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만큼 했으면 됐다는 뜻입니다. 피곤해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기도하려고 하는데 몸이 안 따라 주니까 기도하다 졸고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그만큼 했으면 됐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졸고 자고 있었지만 너희가 기도하는 이곳에 있었으니 됐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야단치고 책망하시기 보다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 주시면서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시고 이만큼 했으면 됐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하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느냐? 너희 마음은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못하는 것을 내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졸 수도 있고 잠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합시다. 한 시간이라고 깨어서 기도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기도자가 됩시다. 기도만이 모든 것을 이길 힘입니다. 대림절 기간 마음을 정해서 기도하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참빛 가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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