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차이(옥합을 깬 사람과 배반한 사람)(11월 13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14:1-11(신약 79)
지난 주에는 종말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일주일을 앞두고 입성하신 다음에 십자가를 지실 날이 점점 다가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잡히실 것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아시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 뒤에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위해서 다시 예루살렘을 들어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이고 이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사건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대비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여인은 예수님께 순전한 나드 한 근의 옥합을 깨어서 드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성경적인 생각과 성경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돈을 받고 판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한 행동과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 때 그것을 평가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기록된 말씀은 같은 사건과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적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성경의 가치관을 넘어서지 않도록 성경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시각 차이”(옥합을 깬 사람과 배반한 사람) 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옥합을 깨 여인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옥합을 깬 여인에 대해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에는 이 여인이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날도 마르다는 일을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옥합을 깨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서 드린 이야기를 보면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일주일간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실 때 밤에 와서 주무신 곳입니다.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가르치시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 날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병 환자라는 말은 현재 나병 환자라는 말이 아니라 과거에는 나병 환자였으나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과거에 나병에 걸렸었지만 예수님께서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정해서 식사 대접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한 여자가 나드 한 근이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3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베다니에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요한복음에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베다니 사건은 기록하지 않았고 또 다른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죄를 지은 한 여인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 찬송가 211장에는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했는데 성경에는 누가복음이 기록된 여인의 이름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찬송가에 막달라 마리아라고 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본문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나드 한 옥함은 매 값진 것, 즉 비싼 것이었는데 이 향유의 가격은 300데나리온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한 데나리온이 하루 일당이고 그렇다면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 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비싼 향휴를 단번에 예수님에게 부어 드린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은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9절을 보면
14: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가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 머리에 부어드린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 한 일은 온 천하 어디에서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자가 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주셨고 이 일은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서 전해질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알지 못하고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렸는데 예수님은 그의 헌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에는 쓸데없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 감동으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헌신할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여인을 비판한 사람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예수님께서 나의 장례를 준비함이란 의미를 부여해 주셨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에는 그런 상황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비판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 그들이 화를 냈습니다. 4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마가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기록했고 마태는 그들은 제자들이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 제자들 전체는 아니었지만 그들 중에 일부라 화를 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항상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감사해서 헌금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어디서 돈을 가지고 와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때론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의 밭에 들어가서 밀을 손으로 비벼서 먹기도 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인데 마리아가 그 귀한 향유를 팔아서 헌금을 했으며 좋을텐데 한 순간에 모두다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제자들 중에 일부가 화를 낸 것입니다.
향유를 부어드리고 싶으면 조금만 부어드리고 나머지는 예수님에게 드리면 우리가 그걸 팔아서 요긴하게 쓸텐데 아니 그 귀한 것을 한꺼번에 다 없애버리다니 하는 생각에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럴듯한 이유를 이야기 했습니다. 5절을 보면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이렇게 말한 사람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 비싼 것을 한꺼번에 부어드리지 말고, 조금만 부어드리고 우리에게 맡기면 우리가 이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말했지만 진짜 속내는 그 돈 중에 일부를 아무도 몰래 자기가 가져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5절을 다시 보면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불필요한 낭비를 한 것이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 귀한 것을 그렇게 사용할 것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가룟 유다의 말이 맞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을 책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리아를 책망하는 가룟 유다를 향해서 가만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괴롭게 하지 말아라 그는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의 눈에는 낭비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은 나의 장례를 위한 헌신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같은 일을 보면서 가룟 유다는 쓸데없는 낭비라고 말한 반면 예수님은 나의 장례를 위한 거룩한 낭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 같은 일을 보았지만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섬김과 헌신으로 이해하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은 거룩한 헌신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못마땅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것은 거룩한 섬김과 헌신과 거룩한 낭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을 계기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과정을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했습니다. 1-2절을 보면
14: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14: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이 일이 일어난 때는 유월절을 이틀 앞둔 상황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엄청난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이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서 죽이기로 모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예루살렘들이 많을 때 예수님을 죽게 하면 궁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명절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하지 말자고 흉계를 잠정 중단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흉계로 죽이기로 하고 때를 기다리는 중에 가룟 유다가 배신을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이전에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 넘기려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가룟 유다가 행동으로 옮기게 된 배경에는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서서 마리아를 책망할 때 예수님은 자기편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가룟 유다 입장에서는 속상하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다의 생각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기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마리아는 칭찬하고 자신은 책망하듯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순간적으로 마음에 시험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시험에 드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가 어떤 사건이나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시험에 들고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회계를 담당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예수님은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하시고 이럴 때 목돈이 들어오게 하셨으면 내가 회계를 하면서 힘들지 않을텐데 돈을 안 주시고, 먹이라고 하시고, 너희가 주라고 하시고 하시기만 하신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회계를 담당하는 분들은 자칫 잘못하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회계를 담당하는 분들에게 못마땅한 투로 이야기하거나 비판적인 말을 하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회계 담당이나 이런저런 일을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말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칭찬하는 말을 합시다. 자칫 한마디 말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고,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의 동기가 잘못됐다고 요한복음에 기록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신을 하게 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지만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거나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화를 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말씀이 은혜가 되고 말씀이 힘이 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입니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지 말고 다른 기회를 보자고 했는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그들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하자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을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룟 유다에게 돈을 주기고 약속을 했습니다. 결국 유다의 목적이 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3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기도 했을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아마도 자신의 결혼을 위해 준비했을 값비싼 향유를 단 한 번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헌신하고 섬길 때 주님은 우리의 헌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시고 넘치는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헌신이 특별한 의미로 인정을 받고, 하늘의 복을 누리는 귀한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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