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11월 27일 낮 예배)
로마서 13:8-14(신약 258)
 
벌써 한해의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작년 대림절을 지내고 성탄절과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2022년을 시작했는데 벌써 11월 마지막 주일이고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해마다 설명드리는 것인데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의 주제는 기다림이고, 대림절 첫 번째 주에 사용하는 초는 진 보라색으로 시작을 해서 네 번째 주에는 흰색 초를 켭니다. 초의 색깔이 진보라에서 보라, 분홍, 흰색으로 바뀌는 것은 주홍빛 같던 우리의 죄가 주님이 오심으로 희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네 개의 초는 예언의 초, 베들레헴의 초, 목자의 초 그리고 천사들의 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대림절에 / 이해인
 
때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밝고 둥근 해님처럼
당신은 그렇게 오시렵니까?
기다림밖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당신은 조용히
사랑의 태양으로 뜨시렵니까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이제 우리는
기다림의 은혜를
새롭게 고마워합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배웁니다.
 
마음이 답답한 이들에겐
문이 되어주시고
목마른 이들에겐
구원의 샘이되시는 주님
 
절망하는 이들에겐 희망으로
슬퍼하는 이들에겐 기쁨으로 오십시오
앓는 이들에겐 치유자로
갇힌 이들에겐 해방자로 오십시오.
 
이제 우리의 기다림은
잘 익은 포도주의 향기를 내고
목관악기의 소리를 냅니다
어서 오십시오. 주님
 
– 이해인,
 
2022년 대림절을 맞이해서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시대적으로 상황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깨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3년을 보내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깊은 잠은 아니지만 졸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2022년 대림절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졸지 말고 깨어나라, 영적으로 잠들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졸지 말고 감기는 눈을 번쩍 뜨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어 있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깨어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잠든 상태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잠든 상태는 사랑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자다가 깰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는 신앙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다가 깨어 난 성도는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 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빚을 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해야 할 일과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영원히 갚지 못한 빚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채의식이란 말을 합니다. 우리가 자다가 깨어난 성도라면 사랑의 부채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전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부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가 깨어 있는 성도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랑은 결과적으로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했는데 이 모든 계명들은 이웃을 사랑하면 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모든 계명과 율법을 지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고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우리가 자다가 깨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율법을 모두 이룬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10절을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결과적으로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에게나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해를 가하는 것, 또는 내 이익을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 여기서 악이란 간음, 살인, 도둑질, 탐내는 것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런 것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포함해서 이웃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해를 입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들과 관련된 계명과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을 보면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 구원의 때가 가까웠다.
깨어 있는 신앙이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어서 우리가 깨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왜 깨어 있어야 하는가 하면 구원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는데
 
이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11절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여기서 이 시기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재림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잠에서 깨어나야 하며 재림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깨어 있는 믿음으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도둑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셨기에 항상 깨어서 주님이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상황들을 보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평안하고, 안전하다 하면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생각하지 않는 시련과 역경이 역사 속에 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어려운 일들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좋은 것이 너무 많고 모든 것이 우리를 편하게 해 줍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영적으로 서서히 잠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지금 내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대림절을 맞이해서 해마다 맞는 성탄이 아닌 지금 이 시기를 분별하고 우리가 신앙적으로 깨어나는 믿음의 상태로 성탄을 준비하고 새로운 해를 준비합시다.
 
우리가 자다가 깨어야 하는 것은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다시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초대교회 당시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주님의 재림이 속히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도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실망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신앙도 나태해지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박해를 받는 상황과 그리스도의 오심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실망감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나태해지는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보다 구원이 더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재림 신앙이 약화 되지 않아야 하고, 또한 구원 신앙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심 신앙은 구원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을 받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구원에 대한 회의감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처음 믿음 때보다 구원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의 확실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가 처음보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보다 지금 구원에 더 가까워진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 믿을 때는 구원의 확신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 약해지고 정말 구원을 받는 걸까? 구원과 영생이 정말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될 수 있는데 그런 의심을 버리고 믿음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더 확신한 구원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울 사도를 통해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이 구절은 시기라는 말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하고 계속해서 밤이 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밤이 깊은 만큼 밤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즉 이제 막 밤이 된 시간이 아니라 깊은 밤이 되어서 시간이 지나서 어둠이 극에 대한 상황이 되었는데 시간적으로 밤이 끝나가고 낮이 임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밤과 어둠은 없습니다. 어둠과 밤은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둠과 밤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울수록 밤이 깊을수록 새벽의 시간과 낮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둠의 시간이 나를 덮고 있고, 어둠의 상황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힘들게 하고 그 상황들이 감당하기 어려워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러나 밤과 어둠의 시간은 곧 끝납니다. 로마의 지배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의 밤이 깊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3. 빛의 갑옷을 입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시고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기에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다가 깨어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기 위해서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어질수록 낮의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새벽이 오고 아침이 와서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잠을 잘 때 입던 옷을 벗는 것입니다. 12절의 말씀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잠 잘 때 입던 옷을 입고 직장에 출근을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있으면 잠을 잘 때 입었던 옷을 입고 그냥 생활할 수는 있지만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잠잘 때 입던 옷을 벗고 생활을 위한 옷을 입는 것처럼 영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시간에 입고 있던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어둔의 일이란 어둠 속에서 살 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살아왔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쿰란 문서에 의하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인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어두움의 사자에 의해 지배를 받고, 다른 한 부류는 빛의 왕자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말세에는 이들 두 세력이 큰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전쟁’ 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 어둠과 밤의 시간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은 어둠의 일을 벗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살아왔던 모든 삶은 어둠의 일에 해당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시간에 입었던 옷을 벗어야 빛의 갑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 즉 어둠의 때를 지내고 빛의 시대를 맞이해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성도들이 벗어버려야 할 어둠의 일은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어둠의 일을 벗으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해야 합니다. 즉 잠옷을 벗고 일상복을 입거나 근무복을 입으면 단정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움의 일을 벗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에 대해서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둠의 일에 속하는 것이기에 이런 일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영적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전투를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은 어둠 일을 벗고 단정히 행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공동번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라고 번역했습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은 육신의 정욕을 위한 모든 것을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도모라는 단어의 헬라어 의미는 ‘창조하다.’, ‘만들다.’, ‘행하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체를 위한 일 즉 육체의 정욕을 위한 일을 만들지 말고, 그런 일들을 시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영적인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데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살아가고 또한 육체의 정욕을 위한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림절을 맞이해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빛의 갑옷을 입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성탄을 기다려야 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성탄의 은총에 감사하며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2022년 성탄의 계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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