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9월 25일 주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10:46-52(신약 73)
 
내일부터는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가 없어집니다. 그동안 밖에서 마스크 착용은 의무사항은 아니었지만 50명 이상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의무사항이었는데 내일부터는 밖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분들은 마스크를 써야되기 때문에 결국은 실외 마스크 착용의 의무는 없어 졌지만 항상 마스크를 준비해서 다녀야 합니다.
 
실내에서 반드시 마스크를 해제에 대한 논의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외국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는 실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 하지 않는 나라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코로나 확진자들이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독감이 유행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방역 당국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직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살펴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게 되고 그들이 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어 이방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아직 귀담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시대가 열리면 자신들은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물으셨고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한 일을 알고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나를 내어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여리고를 거쳐서 올라가시는데 여리고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앞을 못 보는 바디매오를 만나서 고쳐주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사건에서 중요한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려고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들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믿음의 반응에 의해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오늘 바디매오의 눈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에 현실로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희망이 없는 바디매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의 아들이란 뜻으로 ‘바’라는 단어는 사용하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었고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을 바디매오라고 소개했는데 이 말은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를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에만 이 사람에 대한 소개가 디매오의 아들 즉 바디매오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살아가는 것이 희망이 없는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46절을 보면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맹인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맹인이나, 장님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시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바디매오는 언제 어떻게 맹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아마도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서 어려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디매오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본 것이 아니라 살면서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라면 더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절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본 것이나, 살면서 앞을 못 보게 된 것이나 모두가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구걸하는 것입니다. 46절을 다시 보면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대 시대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의 대부분은 안마를 배워서 안마하는 일을 하는 실정입니다.
 
우리 건물 1층에 전에 칼국수 집의 부인이 시각 장애가 있어서 시각 장애인 안마교육을 받아서 안마사로 일하기 위해서 식당을 접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은 자기 생활을 위해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그 시대 이스라엘에서 목축업이나 농업이나 상업 그 어떤 직종에서도 일 할 수 없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일밖에 없었기 때문에 바디매오는 구걸을 하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고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바디매오의 삶은 희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구걸해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 이스라엘은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가뭄도 자주 들었고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 땅을 떠나서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갔습니다.
 
살기 힘들어지면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은 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구걸하는 사람에게 인심이 후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다른 질병도 아니고 시각 장애는 의사들이 고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시각장애는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눈을 고쳐서 볼 수 있게 될 희망도 없고, 사람들에게 얻어먹고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바디매오에게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포기하지 않는 믿음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구걸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바디매오에게 한 줄기의 희망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지역에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바디매오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내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희망을 품고 있던 바디매오가 살고 있던 여리고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느날 길거리에 소란스러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면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던 바디매오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물었을 것입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님이 오셨고 지나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고 계신다는 것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47절을 보면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희망이 없이 살아오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에 간절하게 소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시기만 하면 내가 그분에게 나아가서 도와달라고 간구해야겠다. 그런데 그분이 오셨고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디쯤 가시는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고 구걸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친 것은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 대망 사상이 있었는데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가 외친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외치고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48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바디매오가 큰 소리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계속해서 외치자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야단을 치면서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네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들을 수가 없다고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씀을 듣지 못하고 너무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 때문에 꾸짖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나름 합당한 이유를 대면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큰소리를 지르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는 다시 못 올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간절함이 예수님에게 전달되기를 기대하면서 더욱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합리적인 이유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결코 포기하지 말고 더 간절하게 더 열정적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을 포기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 갔습니다. 49-50절을 보면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간절하게 부르짖는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가서 안심하라고 말하고 일어나라 그가 즉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하자 그는 겉옷을 내버려두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라고 하신다고 하자 뛰어 일어나서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갈 수 있도록 손을 붙잡아주었거나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앞에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소리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 나아간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는 기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그가 앞을 못 본다는 것을 알았고 길거리에서 구걸을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눈을 뜨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즉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직접 기도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필요를 고백하길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다 아시니까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아십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51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지를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티브 광고 중에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고 물으니까 장윤정이 알아서 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멘트가 있는데 하나님 알아서 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디매오처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5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이야기 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간구하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없다고 믿었다면 보기를 원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하실 줄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어둠에서 구원하여 광명을 보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이 음성이 들여지길 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지금 네가 믿고 간절히 구하는 대로 너의 믿음대로 이루어지고 너를 얽매고 있던 모든 것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하심을 듣게 되길 원합니다.
 
네 믿음이 네가 믿은 대로 네가 간절히 소원하는 구한대로 이루어지고 너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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