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8월 14일 주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7:24-37(신약 65)
 
마가복음 7장의 앞 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기 위해서 왔는데 제자들중에 몇 사람이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항의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장로의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폐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전통보다 말씀이 중요하고 전통보다 말씀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들과는 달리 일반 사람들 즉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고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라고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문제만 찾으려고 한 반면에 일반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잘하셨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보는 것과 일반 백성들이 보는 것에 대한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볼 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성경을 볼 때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사역을 하신다고 해도 모든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예수님을 믿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가 살고있는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보는 종교 지도자들의 시선이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모든 것을 잘하신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은혜라는 믿음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오늘 종교 지도자들의 시선이 아닌 일반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나에게도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 즉 “그가 하신 모든 것을 잘하였다.” 고 고백하는 믿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가 하신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엄마(어머니)는 못할 것이 없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머니는 강합니다. 어머니가 되기 전 여자는 연약하지만 어머니가 된 뒤에는 어머니는 강해집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딸이 귀신 들려 고생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 앞에서 무시를 당하지만 딸을 위해서 끝까지 간구함으로 귀신 들린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문제라면 이렇게까지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딸이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어머니로써 여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인이 아닌 어머니로서 딸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경우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는데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들보다는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인 즉 어머니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딸이 더러운 귀신 들려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25절을 보면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이 여인에게는 어린 딸이 있는데 그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질병도 고치지 쉽지 않은데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는 어린 딸을 고치는 것은 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어머니가 볼 때 딸은 귀신 때문에 수없이 많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고 그런 딸을 보는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딸을 고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여인에게 있는 또 다른 문제는 그가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여인은 이스라엘이 아닌 헬라인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자신의 딸을 위해서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와서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여인은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왔는데 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을 다시 보면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헬라인으로 유대인인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절대자로 인정해서 굴복한 것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어린 딸을 위해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여인이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리며 간구한 것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닌 어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셔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물론 모든 성도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만 특히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더 큰 기적이 나타나는 능력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로서 여인은 예수님께서 무시하시지만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27-28절을 보면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구하자 예수님은 여인이 헬라인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고 나서 자녀들이 먹고 남은 것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표현대로 하면 예수님은 여인을 ‘개 무시’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은 개로 여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자신을 ‘개 무시’ 하는 예수님에게 옳습니다. 그런데 상아래 있는 개들이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 나를 개처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내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의 은혜를 받을 수 없지만 개 취급을 하셨으니 개들처럼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신 예가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무시하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시지만 그럼에도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귀신이 나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29-30절을 보면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여인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간구했고 예수님은 그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이 말을 하였으니” 즉 부스러기라도 구했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갔고 아니는 평안히 누워있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에는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인정받기를 축원합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2. 에바다(열리라)
첫 번째 이야기는 두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두로에서 떠나서 다시 갈릴리 호수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병자들과 귀신 들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두로 지방에서 귀신 들른 딸을 고쳐주시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는데 그때에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31-32절을 보면
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7: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됩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귀먹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청각 장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각 장애가 있는 분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청각장애를 가진 분들은 언어구사 능력이 떨어져서 말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청각 장애로 인해서 말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 데리고 온 이유는 안수하여 고쳐주시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안수해서 고쳐주시길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청각 장애를 가진 분을 고쳐주시면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치실 때 침으로 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셔서 가서 씻고 고침을 받았다고 요한복음 9장에 기록했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의 치료는 말씀으로 선포하시거나 안수하거나 하셔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고, 침을 뱉어 그 사람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즉 손에 침을 뱉으셔서 그 침을 그 사람의 혀에 대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수해서 고치달라고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침을 혀에 발라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똑같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 중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공식화 해서 마치 어떤 하나의 방법외에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탄식하시면서 에바다 하시자 그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34-35절을 보면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7: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길 기대하신 것이고 탄식하셨다는 것은 청각 장애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을 보면서 탄식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보시고,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고통을 느끼시며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에바다 하시며 선포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말로 막혔던 귀가 열리고 말 더듬는 상황에서 입이 열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하심에 귀가 열리고 맺혔던 혀가 풀려서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즉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면 우리를 묶고 있던 어려운 문제들이 풀리고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묶고 있던 모든 것이 풀리는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하심에 귀가 열리고 맺혔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 상황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모든 것을 잘하셨다고 평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36-37절을 보면
7: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7: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종종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견재하면서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상황에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면서도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문제제기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시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고치시고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내가 기도해서 병자가 고침을 받으면 사진을 찍고 병원 진단서 첨부해서 홍보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했더니, 우리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는데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고 자랑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신 예수님을 보시고 놀랐을 것이고 듣지 못하고 말 더듬던 사람인 잘 듣고 말을 잘하게 된 것을 보고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륜이 쌓이면서 어쩌면 이런 감동과 놀람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다시 감동과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고 놀라워할 수 있는 열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잘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37절을 다시 보면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께서 기적을 못하게 방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청각 장애인을 고쳐주신 것은 잘하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다 잘하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잘한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을 세상에 유익을 주는 것이고 정말 잘한 일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참빛교회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정받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을 잘하신 것입니다. 참빛교회가 하는 모든 일도 잘한 것이라고 인정받게 될 줄 믿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잘한 것이라고 인정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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