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행하라 그러며 살리라(7월 10일)
누가복음 10:25-37(신약 111)
 
오늘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는 어느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이 됩니다. 율법 교사는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사람들에게 율법에 대해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종교인입니다. 이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가 시험하려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대답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적인 논쟁 중에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냐 아니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냐? 하는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율법주의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그 이유 중에는 그들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강조한 반면 예수님은 믿음을 강조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성도는 믿는 성도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면서 말씀을 듣고 행하면 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당연한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는 말씀을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5절에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질문한 의도는 정말 영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즉 나름대로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으로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율법에 위배 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가 어떤 의도로 질문했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고 되물으셨습니다.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 교사의 의도를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그럼 네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알고 있는 율법에 기록된 말씀은 무엇이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라는 의미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어긋난 말씀을 하시는지를 살펴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서 정통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율법 교사야 율법에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이 뭔가 꼬투리 잡을 만한 이야기를 하시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에게 질문을 하시자 자신이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을 대답했습니다.
 
그는 먼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27절을 보면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 교사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율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은 신명이 6: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그러므로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이고 힘을 다 바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즉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 기울이고 있는 힘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는데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몇 가지 이야기를 기록한 다음에 한 말씀입니다.
 
레 19:16-18절까지를 보면
19: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비방하지 말라, 네 이익을 위해 이웃의 피를 흘리지 말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 원수를 갚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지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 교사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율법 교사의 대답을 들으시고 그의 말에 동의해 주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 말은 네가 율법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고 율법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제대로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너는 네가 말한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즉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의 핵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되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가 율법이 핵심을 잘 알고 있느니 너는 그 말씀대로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진정한 믿음은 알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 믿음이고 알고 있는 것을 행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한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시자 율법 교사는 29절에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라고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서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시지 않으셨고 자신이 말한 것을 인정해 주고, 그리고 그것을 행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 앞에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 말은 자신이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서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맞지요?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 이웃을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내가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율법에서 말하는 이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이런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먼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다고 말씀하습니다. 30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화를 들어서 설명을 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그 옷도 다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그대로 길에 버려두고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보다 250m의 낮은 지대로 두 지역 간의 거리는 약 36km 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고 합니다. 제롬에 의하면 A.D.4세기 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떼들이 횡행했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강도들에게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버려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그곳에 종교인(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지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32절을 보면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마침’(카타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강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거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란 말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제사장으로 임무를 충실해 수행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고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장으로 사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는 것보다 자신의 종교적인 사역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서 피해서 갔을 것입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도와서 성전 예배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 불쌍하긴 하지만 자신은 예배를 돕는 사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피해서 지나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지나간 것은 그들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자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가는 길에 또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고난 당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예배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우선인가? 고난 당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피해야 지나감으로 인해서 강도 만난 사람은 길거리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3절을 보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사람으로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서 버려졌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724-722년에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이방 민족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합 민족과 종교혼합 정책을 펼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피도 섞인 혼혈족이었고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방 종교를 함께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쨋든 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대립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유대인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록 유대인지만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종이 다르고 신앙이 다르다 할지라도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지만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돌아보았습니다.
 
3.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 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돌아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들 돌아본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고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33절을 다시 보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 원수같이 지내는 사이였지만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질병으로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처럼 세상은 영적으로 강도 만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34절을 보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먼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주었습니다. 이것은 기름과 포도주는 소독을 해 주고 상처를 치료해주는 약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맞아서 찢어지고 멍든 곳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서 소독을 해 주고 통증이 가라앉게 해 주고 상처에 세균이 들어가지 않도록 그리고 통증이 완화되도록 싸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짐승이 그 사람을 태우고 주막으로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아 준 것입니다. 어쩌면 강도 만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게 되면 자신은 살인 누명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치료해 주고 돌보아 준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치료해 주고 돌보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끝까지 돌보아 주려고 했습니다. 35절을 보면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자신이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계속 머물면서 돌보아 줄 수 없지만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사람을 돌보는 비용이 더 들어가면 내가 돌아올 때 와서 필요한 경비를 지불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잠깐 관심을 기울이고 돕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돌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돕기로 하고 돕는 일을 시작하는 것은 잘하는데 어느 정도 하다가 중간에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도움이 필요한데 우리는 잠깐 반짝 돕다가 끝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려움 당하는 사람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돕겠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이웃이고 누가 강도 만난 사람과 어려움 당하는 사람의 이웃이냐? 우리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내가 할 수 있는 도와주는 열정과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돌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진정으로 사랑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가정과 삶의 현장에 임하고, 그 나라의 복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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