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굼(6월 5일 주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5:35-43(신약 61)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배를 타고 다시 돌아오셨을 때 배에서 내리자 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를 따라서 가시던 중에 지난주에 살펴본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고 믿고 예수님의 옷을 만진 순간 열두 해 동안 고치지 못한 혈루증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길거리에서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고침을 받고 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려고 하는데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방금 전에 죽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이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야이로에게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고 말씀하시고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집에 가서 죽은 아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달리다굼”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달리다굼은 ‘달리다’와 ‘쿰’이 합쳐진 단어로 달리다는 여자아이라는 단어이고 쿰은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달리다굼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죽었던 열두 살 된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매 아이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린 소녀가 죽음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
 
1. 아버지 야이로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아버지로서 야이로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아버지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이를 살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이 많은 의사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병을 고쳐보려고 노력한 것처럼 아이의 아버지로 야이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딸은 고침을 받지 못하고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인 야이로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22절을 보면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야이로는 회당장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들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로 인해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들로서 회당장 제도가 등장하면서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회당장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 “회당장” 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회당장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야이로는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처럼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은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도 그런 상황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이로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당시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상황보다는 딸을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딸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하면서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아버지 야이로도 엄마인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자식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아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서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야이로는 간곡히 구했습니다. 23절을 보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간곡히 간구했다는 말은 간절하게 애원했다는 의미입니다. 간곡히 라는 단어는 ‘많은’ 이란 의미와 함께 강력하게 라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간곡히 구하여라는 말은 간절하게 애원했다는 의미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렸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은 그가 회당장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고, 또한 간절하게 애원하며 예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야이로의 간절하게 애원한 것은 어린 딸이 죽게 되었기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으사 구원을 받아 살게 해 달라는 간절한 애원이었습니다. 아버지 야이로는 사랑하는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죽어가는 딸을 보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아버지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한 가득의 희망이었습니다. 어린 딸을 살릴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야이로는 오직 예수님만이 내 딸을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절하게 애원한 것입니다.
 
내 집에 오셔서 죽어가는 내 딸에게 안수하셔서 고쳐주셔서 살아나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아버지 야이로가 간절하게 애원하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야이로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를 따라서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길을 가시는 도중에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의 간절한 애원을 들이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께서 잠시 지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체하신 것은 예수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 고침 받게 됨으로 인해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이 잠시 지체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에 가서 자기 딸에게 안수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다보니 자기 집으로 빨리 가실 수 없는 상황인 것도 야이로의 마음을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시간이 급하니 내가 빨리 갈 수 있도록 비켜달라고 하시고 달려가듯이 가셔야 될텐에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아마도 천천히 가시는 중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가시던 길을 멈추고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한 여인이 와서 엎드리고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시고, 야이로는 속이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마음을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문제가 빨히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생각할 때 답답하게 느껴지는 상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지 조금씩 지체되는 상황에서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35절을 보면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우리 딸에게 안수하시면 살아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데 집에서 사람들이 급히 달려와서 하는 말이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하는 전갈이었습니다.
 
야이로는 깊은 탄식을 했을 것입니다. ‘아! 예수님께서 조금만 빨리 우리 집에 가셨더라면 내 딸이 살아날 수도 있었을텐데’ 깊은 탄식과 절망을 했을 것입니다.
 
딸을 살려보겠다고 예수님께 엎드려 간구했고, 모시고 집으로 가는 길인데 야속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절망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말할 수 없는 절망과 아픔을 느끼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상황이고 예수님께서 가셔서 안수해 주시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너무 허무하게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절망하는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36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깊은 탄식을 하고 절망과 좌절을 하고 있는 야이로에게 위로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딸의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에게 와서 기대했던 그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마음에 품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러나 내가 너의 딸에게 안수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이로가 들은 소식은 마음이 아프고 두렵고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너의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믿으면 너에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3. 소녀야 일어나라
예수님은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던 길을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37절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급히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야이로의 집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했습니다. 38절을 보면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12살 된 어린 소녀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아이의 엄마와 가족과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우리 옛말에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소리를 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도 하고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특히나 어린아이들이 죽는 것은 가족에게는 아픔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 년이면 몇 번의 장례식을 경험하게 되는데 정말 가슴 아프고 슬픔을 느끼는 장례식이 가끔씩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고 가장 가슴 아팠던 장례식은 12살, 10살 두 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엄마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초등학생들이었던 두 딸이 큰 소리로 울면서 엄마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어쨋든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9-40절을 보면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사람들이 슬퍼하면 울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왜 떠들고 우느냐고 말씀하시고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비웃었습니다.
 
누가 봐도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아이를 보지 못했음에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장례식이 났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위로의 말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문구인데 이 표현에서 명복이란 단어는 저승에서 복을 받길 바란다는 의미로 불교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화된 표현이기는 한데 기독교인들은 가능하면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유족들 위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좋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으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라는 표현도 무난한 표현으로 이 말은 ‘정중하게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표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조화를 보내셔야 할 때는 근조라는 표현과 삼가조의를 표합니다. 정도로 보내시는 것이 좋고 위로의 말을 전할 때도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위로가 유족들 위에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근조라는 단어의 뜻은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삼가 슬픈 마음을 나타냄’ 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를 데리고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41-43절을 보면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십니다. 우리의 병든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고, 절망을 느끼는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고 가난한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십니다.
 
선한 능력으로 우리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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