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비유(5월 8일 주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4:21-34(신약 59)
 
♥성공하려면 말투부터 바꿔라♥
 
모든 사람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과 말이다.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듯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남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
 
자신이 자주 쓰는 말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라.
그러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말투부터 다르다.
 
성공하는 사람은 어떻게 말할까?
그럼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보겠다.
이 질문은 당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 말이다.
 
“요즘 어떠십니까?”
 
보통 이런 질문을 받으면
긍정형, 평범형, 부정형, 세 가지 형태로 답을 한다.
 
부정형
이들은 질문을 받으면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별로예요.”,”피곤해요.”,”죽을 지경입니다.”,”묻지 마세요.”,”죽겠습니다.”
 
평범형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저 그렇지요.”,”대충 돌아갑니다.”,”먹고는 살지요.”,
“늘 똑같죠.”,”거기서 거깁니다.”
 
긍정형
이들이 하는 말에는 열정과 힘이 가득 실려 있다.
“죽여줍니다.”,”좋습니다.”,”대단합니다.”,”환상적입니다.”,
“끝내줍니다.”,”아주 잘 돌아갑니다.”
 
이 세 가지 유형 중 당신은 어떤 유형이 맘에 드는가?
아마 긍정형의 말투일 것이다.
 
말의 습관이 삶을 만들어 갑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을 하면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대할 때도 잘못하는 것보다 좋은 것과 희망적인 말을 해주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축복해 주는 말을 하고, 항상 좋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희망적인 말을 하면 서로에게 힘이 되고 하나님의 주시는 복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에는 세 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열매 맺는 좋은 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세 가지 비유는 각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들은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비유인데
 
1. 등불의 비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 두려 함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호롱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전기불이 없던 시절에 집집마다 등불을 켜서 집안을 비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불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에 보면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등불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등불은 등경 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등경은 등잔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등불을 올려놓는 기구를 말하는 것으로 등잔대 즉 등경 위에 등불을 올려놓아야 등불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빛이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은 등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빛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작은 등불이라고 할 때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등잔대 즉 등경 위에 있었습니다. 등경은 가정에서 방을 밝히거나 거실 같은 곳을 밝히기 위해서 준비된 도구이고 등경 위에 등불을 둔다는 것은 우리가 먼저 빛을 비추어야 할 곳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기적적인 성장을 하면서 어떤 면에서 보면 교회나 성도들이 작은 것보다는 큰 것에 심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 건축을 한다든지 교회에서 어떤 사업을 할 때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큰 교회를 건축하고 큰 사업을 하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큰 꿈을 꾸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큰 꿈을 꾸고 큰 비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너희는 등불인데 등경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불은 마을을 비추고 세상을 비추는 빛 보다는 가정, 그중에서 한 방을 비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빛을 비추어야 할 곳은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빛이 되고 우리 가정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들이 이제 마음을 새롭게 해서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작은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참빛 교회 모든 성도들이 가정에서부터 등불이 되고 가정의 등경 위에 올려진 등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등불로 인해서 감출 수 없고 모든 것은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면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 표현은 조금은 애매하게 보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감추어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21절과 연결해서 해석한다면 등불을 말 아래나 평상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면 집 안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이란 것은 옛날에 쌀이나 곡식을 살 때 담아서 용량을 재는 기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말은 지금 8kg에 해당합니다. 등불을 말과 같은 엎어 놓은 상태로 그 안에다 두지 않는다는 말이고 평상 아래도 역시 등불이 빛을 비추지 못하게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등불은 말 아래는 평상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둠으로 인해서 집안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빛이라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모든 것이 들어나게 된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에 대한 비밀 즉 천국에 대한 비밀은 감출 수가 없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등불로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고 예수님이 구원의 주님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가깝게 우리 가정에서 우리의 가족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고 천국에 대해서 재림과 종말에 대해서 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빛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늘 진실하게 신실하게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모든 것은 내가 한 대로 되돌려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25절을 보면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우리가 등불이라면 빛으로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데 등불로서 우리가 행한 대로 모든 것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응이라고 표현하는데 특별히 빛된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헤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헤아리면 그 비판과 헤아림이 우리에게 되돌아 올 뿐만 아니가 내가 한 것보다 더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나에게 축복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수 있도록 비판하기 보다 칭찬하고 저주하기 보다 축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라나는 씨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두 번째 비유는 자라는 씨의 비유입니다. 자라는 씨의 비유는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범한 비유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평범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씨는 자라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6-27절을 보면
4: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농부는 봄이 되면 밭에 씨를 뿌립니다. 땅에 떨어진 씨는 농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싹이 나서 자라게 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기는 했지만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정확하지 알지 못합니다.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즉 시간이 지나면서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는 점점 자랐습니다.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들어와서 씨가 자라듯이 확장되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될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점점 성장하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씨가 자라고 변화되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우리 안에 우리 삶에서 점점 자라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씨가 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과정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을 보면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씨를 뿌리면 씨가 곧바로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씨에서 싹이 나야 하고, 그리고 싹이 자라서 꽃을 피워야 하고, 그리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씨가 바로 열매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자라고 성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성취되기 위해서도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이고 신앙적으로 씨앗이 우리의 마음에 뿌려지고 그 씨가 우리 마음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싹을 내고 자라기 위해서는 영혼의 양식은 성경을 묵상하고 성령의 생수로 채워져야 하고 기도와 찬양의 거름이 우리의 마음에 채워져야 합니다.
 
또한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시련도 겪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밀과 보리를 주식으로 삼는데 밀과 보리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면서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곡식들은 봄에 씨를 뿌리면 여름이라는 무더위를 견디어,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 자라는 하나님 나라는 자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겪는 시련을 이겨낼 때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과정을 겪고 나면 추수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절을 보면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씨를 뿌리는 농부는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둡니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를 뿌린 농부는 열매 맺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열매가 맺히면 추수를 합니다. 때가 되면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맺히면 추수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열매가 풍성하게 열렸는데 추수하지 않으면 다 떨어져 버립니다. 때가 되면 추수를 해야 되는데 하나님 나라도 추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추수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추수 때가 있습니다. 추수 때를 놓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데 우리에게 주시는 개인적인 추수 때에 풍성한 열매를 추수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추수 때인 주님 다시 오실 재림의 때에 천국 창고에 들여지는 영적인 알곡 신앙이 됩시다.
 
3. 겨자씨 비유
오늘 본문의 세 번째 비유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 비유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고 우리의 믿음도 겨자씨 같은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31절을 보면
4: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예수님께서 자라는 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였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하시면서 겨자씨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참깨 정도 크기의 씨앗으로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아주 작은 겨자씨를 땅에 심은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은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겨자씨 같이 아주 작은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유대 땅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전 세계를 놓고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겨자씨 같이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역사 전체에서 볼 때 겨자씨 같은 사건이고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신 이스라엘도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겨자씨 같은 작은 땅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크고 놀라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겨자씨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큰 자리,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교회가 아주 큰 교회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이 겨자씨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되었습니다. 32절을 보면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아주 작은 씨이지만 심어놓고 자라게 되면 나무처럼 자라서 그늘에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식물이지만 일반적으로 약 1m 정도 자라고 3m 정도까지 자라기도 한다고 합니다. 겨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 참새들이 앉아 있기도 하고 둥지를 틀기도 한다고 합니다.
 
겨자는 나무는 아니지만 새들이 그 그늘에 와서 깃들이고 쉴 수 있을 만큼 자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같은 작게 들어왔지만 하나님 나라가 자라서 그 그늘아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쉼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복을 누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작은 것이지만 믿음으로 누리게 될 은혜를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겨자씨 같이 임한 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겨자씨 같은 작은 존재이지만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전하는 복음의 전달자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등불처럼 비추는 존재가 되고 자라는 씨처럼 믿음의 과정을 잘 거치고 영적인 추수를 하는 삶이 되고 겨자씨 같이 작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작지만 큰 교회와 성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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