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심 그리고 영광(4월 10일)
빌립보서 2:1-11(신약 319)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33년을 인간으로 사시다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처음 들어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신 이후로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다른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로 영접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넘겨졌고 결국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의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이 없다면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죽으심이 없었다면 우리의 죄 문제와 영생의 문제는 해결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우리에게는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이 우리에게 은혜와 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가슴 아픈 고통이 우리에게 평화가 되고 치유가 되고 사함이 되고 구원의 길이 된 것입니다.
 
종려주일이자 고난 주일에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돌아보는 고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내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그 크신 사랑과 온갖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그 마음이 우리 안에 있나요?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이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지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기독교인들이 두 부류로 나누어져서 하나님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반대되는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독설에 가까운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 페친 목사님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 만큼 전도에 열심을 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을텐데 우리는 복음이 아닌 다른 것 때문에 너무 열을 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고난 주간을 지내고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세상에 나누는 고난 주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맞이합시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죽으심 그리고 영광” 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돌봄 공동체를 이루자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자고 말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신앙공동체로 굳건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돌아보는 돌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고 우리가 세워가야 할 공동체는 서로를 돌아보는 돌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돌봄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교회 공동체에서는 권면과 위로와 교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권면이란 말의 의미는 바울 사도께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 서로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권면한다고 할 때 근거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권면해야 합니다. 권면한다는 것은 책망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면을 듣는 사람이 상처를 받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힘을 얻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권면은 연약한 믿음이 더 굳세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에는 반드시 사랑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사랑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는 형제를 위로해야 합니다.
 
위로는 사랑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한다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경우들이 있는데 교회 공동체에서는 서로 진심이 담긴 사랑으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교제와 자비와 긍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돌보는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권면이나 위로나 교제를 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자비와 긍휼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자비와 긍휼과 사랑에 근거할 때 마음을 같이 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을 품고 서로 하나 된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돌봄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돌봄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언제가부터 우리는 내가 최고야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도 내가 제일이야 하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들을 내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최고야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알맹이는 없는데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열심히 자랑을 하긴 하는데 알맹이는 없다는 것입니다. 뭔가 열심히 자랑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자랑할 거리가 없는데 자신이 생각할 때는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않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최고가 아니라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고 본받을 점이 있다고 인정을 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 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과 남을 돌보는 공동체입니다. 4절을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여기서 돌본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먼저 생활의 어려움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의 생활의 어려움이 없도록 내 생활을 위해서 나를 잘 돌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이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지를 보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는지 서로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서로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돌보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은사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은사를 잘 살피고 또한 사람들이 어떤 은사가 있는지 주님을 섬기고 교회에서 봉사할 때 각자에게 있는 은사를 잘 살펴보아서 받은 은사대로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 된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울 사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요즘 연예인들이 본캐와 부캐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본캐는 자신의 원래 캐릭터를 말하는 것은 부캐는 자신의 다른 캐릭터를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이시면서라고 번역을 했고, 공동번역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오늘날 연예인들이 사용하는 표현으로 한다면 예수님의 본캐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위해서 부캐이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버리시고 친히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7절을 보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동등하심을 버리시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 즉 사람들의 형체를 입으시고 친히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를 비워라는 말은 하나님의 권능을 버리시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것을 다 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셨고,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으시고 로마 군인들의 채찍에 맞으실 때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머리는 피로 물들었는데 가시 면류관이 찌르는 고통을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모두 느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스스로 하나님의 권능을 버리시고 연약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하신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우리가 마취 없이 수술을 받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취제 없이 그 모든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8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권능을 버리시고 완전한 인간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제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죽으시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복종하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는 속죄의 어린양이 되셔서 친히 십자가의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부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복종하셔서 희생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3. 그러나 영광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오히려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셨고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영광이 되었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9절을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은 ‘휘페르’(위로)와 ‘휩소스’(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은 가장 뛰어난 이름이고 가장 위대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름 모든사람들이 믿는 섬기는 이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 승천하게 하심으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무릎을 꿇는다는 말의 의미는 경배한다는 의미와 함께 복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모든 무릎을 꿇어 경배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늘에 있는 자들은 천사들과 이미 하나님 품에 안긴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땅에 있는 자들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은 지옥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늘과 땅과 지옥에 있던 모든 존재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무릎을 꿇어 경배하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1절을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존재들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어 경배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하심으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고 모든 무릎이 꿇어 경배하고 복종하면서 주님이라고 부르게 되고 그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 주님의 사랑을 근거로 그 사랑의 마음을 품고 하나 된 사랑 공동체와 돌봄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이 참빛 모든 가족들에게 함께 하심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사랑과 돌봄 공동체인 참빛 공동체로 굳건하게 세워져 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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