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3월 20일 주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2:18-28(신약 55)
 
요즘은 여름의 무더위를 에어컨으로 극복을 합니다. 우리에게 에어컨이 없다면 여름을 지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어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어컨을 만든 사람은 윌리스 캐리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원래 난방기기 업체에서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회사로부터 회사의 주요 고객인 셔킷 빌헬름 출판사의 인쇄물이 여름철이면 높은 온도와 습도 때문에 변질되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는 역발상을 하게 되는데 ‘난방용 배관에 차가운 공기가 흐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결과 온도와 습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캐리어는 1906년 에어컨 특허를 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 중에는 이렇게 역발상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익숙한 것을 따라 살기보다는 생각의 전환 즉 발상의 전환을 할 때 새로운 삶이 열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을 뛰어넘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한다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도 있고 생각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다는 말씀은 율법과 복음을 설명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복음이라고 할 때 복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즉 과거의 틀을 버리고 새로운 복음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옛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전통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과거에 익숙했던 것을 떠나서 복음 안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교회들에게 새 부대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 익숙했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전환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듯 우리는 새 포도주인 복음을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더 많은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더 많은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고 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금식 논쟁
오늘 이야기는 금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중에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신 것에 대해서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긴장하게 되었고 늘 예수님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금식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되는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18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 논쟁이 발생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앞 절에 베풀어진 세리 레위의 잔치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일에 베풀어짐으로써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언급된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의 준수와 전통의 고수라는 점에서 바래새인들과 종교적으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둘째 날과 다섯째 날) 금식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규정이 나타납니다(레 16:29, 31, 23:27-32, 민 29: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부림절과 예루살렘 함락일 같은 날 등 매년 네 번의 금식을 지키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엄격한 바래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눅 18:12) 금식을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유대인 전통을 따라서 철저하게 금식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침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상황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기를 기도하고 그리스도가 오시길 기다리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간절함으로 금식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유대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열심히 형식적인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금식일에 금식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비판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18절을 다시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서 질문을 했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을 추종하는 사람이 와서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따르고 있었고 또한 세례 요한을 따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하는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비판적인 질문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20절을 보면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할 이유가 있을 때 진정한 마음으로 금식하게 될 것이라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 기도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금식은 필요할 때 진실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금식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이사야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의 결과에 대해서 사58:8절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날에는 즉 금식을 해야 할 상황이 올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전통을 따라서 형식적인 금식을 하는 것 보다는 절실 할 때 성경 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식 논쟁을 통해서 예수님은 유대주의적 전통이 아닌 복음으로 새롭게 해석된 금식을 하는 것이 진정한 금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율법에서 복음으로
예수님께서 금식 논쟁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내가 복음으로 왔으니 이제는 율법의 전통이 아닌 복음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는데 복음에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율법을 강조하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유대 절기를 강조하고 제사법을 강조하고 메시아닉 처치를 만들어서 구약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에서 복음으로 바꾸신 것을 다시 복음에서 율법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따라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는데
 
복음은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19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혼인식은 특히 경사스런 행사였습니다. 손님들은 때로는 한 주간이나 계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를 하는 동안에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혼인 잔치 중에 금식을 하게 되면 잔치가 끝나기 때문에 혼인 잔치가 열리는 중에는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가 열렸고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를 즐길 때는 금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예배는 혼인 잔치에 참여한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거룩한 신부들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는 금식하는 슬픈 예배가 아닙니다. 혼인 잔치와 같이 기쁨과 감사가 있는 축제 같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매인 예배를 드리지 않고 복음 안에 혼인 잔치 같은 예배를 드리고 우리의 삶도 율법에 매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영적 혼인 잔치의 축제를 즐기듯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두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는데 먼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는데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헌 옷에는 낡은 천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율법은 낡은 낡은 옷에는 낡은 조각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복음은 새 옷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과 관련해서 에베소서 4:22-24절에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고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옛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살아가는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면 포도주가 발효가 진행되면서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게 되고 결국 부대도 포도주도 다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두면 발효가 진행되면서 가죽이 팽창해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포도주와 부대 모두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이란 새 포도주를 가졌다면 율법이란 부대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복음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새로워지고 복음 안에서 생각을 바꾸고 발상의 전환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3. 인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금식 논쟁에 이어서 안식일 논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금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안식일 논쟁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 전개를 보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23-24절을 보면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을 자른 이유를 먹기 위해서 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밀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열기 위해서 밀을 잘랐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 없는 곳을 지나서 목적지로 가려고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 밀을 잘랐다는 의미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앞뒤에 기록된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볼 때 제자들이 밀을 자른 것은 예수님의 길을 만들기 위한 목적보다는 먹기 위해서 자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밀을 자르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랐고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윗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25-26절을 보면
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삼상 21:1-6절까지의 말씀을 들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삼상 21장에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당시 제사장의 이름이 차이가 있는데 당시 제사장의 이름은 아히멜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 때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당시 사울을 피해 도망 가던 다윗이 예루살렘 근처 놉에 있던 성막에 가서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고 제사장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어서 다윗이 가지고 가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문제는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제사장이 다윗에게 주었고 다윗이 그것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은 진설병을 먹기 위한 조건을 제시했고 그 조건에 맞으면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 그렇게 한 것은 모든 것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적용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것을 제사장이 인정했는데 배고픈 사람이 밀 이삭을 잘라서 먹는 것은 인정되는 것이기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7-28절을 보면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시 유대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대로 한다면 안식일에 대한 역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목숨 걸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 동안 일하시고 일곱 째 날 쉬시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제정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쉬는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조항들을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얽매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안식일을 주셨는데 너희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데 주일은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6일 동안 일하고 제 칠 일에는 안식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또 다른 굴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에게 또 다른 굴레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안식을 지키되 은혜와 감사로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안식일에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예배 속에 임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말씀 안에서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말씀 안에서 새롭고 복된 길을 열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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