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1월 30일)
고린도 전서 13:1-13(신약 279)
 
오늘부터 설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설 명절이긴 하지만 코로나 오미크론이 확산이 되는 상황이라 고향이나 가족들에게 못 가신 분들도 있을 것 같고, 그래도 부모님들 뵙기 위해서 오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명절 연휴에 아무 데도 안 가고 집에만 있기에는 답답할 수 있어서 어쨌든 여기저기 다녀보게 되겠지요. 어디든 오가는 모든 길에 안전하고 평안한 길 되시기 바랍니다. 연휴가 끝나고 즐거운 명절 연휴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지난주에 고린도 전서 12장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12장에서는 여러 은사와 직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은사와 직분은 한 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지체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고 각기 다른 은사와 직분을 받은 지체인 우리들이 즐겁게 몸 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지체된 우리들이 함께 즐거워하면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했는데 더욱 큰 은사라는 표현은 개인적인 은사가 아닌 교회와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은사라는 의미이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면서 가장 좋은 길을 보이리라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더욱 큰 은사와 가장 좋은 길은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각 지체인 성도들이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은사와 직분을 주셨는데 은사와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를 세우는 지체들인 성도들에게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말씀을 제목으로 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기서 제일이라는 단어는 메이존 μείζων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더 크다.’,‘더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역 개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경은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에서 제일 위대한 것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 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가고, 사랑이 있어야 가정이 행복하고, 사랑이 있어야 나라가 견고 해 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께서 사랑이 위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1.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12장에서 은사와 직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은사와 직분은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별로이고,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있고,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12장에서 말한 모든 것이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떤 은사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가장 먼저 방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라고 말하는데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라는 의미로 우리가 하는 방언 중에는 다른 나라 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말도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방언이라고 할 때 사람의 말도 있고, 천사들의 말도 있고, 동물과 식물과 소통하는 방언도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들의 언어인 방언과 천사들의 언어를 할 수 있는 방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사랑이 없다면 그 은사는 사실상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소리 나는 악기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의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의 은사는 그 언어가 하늘의 언어인 천사들의 언어라고 해도 그냥 꽹과리 소리와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의 은사와 산을 옮길만한 믿음과 능력을 행하는 은사가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이 이 은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과 큰 역사를 하는 은사를 받았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행함에 있어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언을 하면서 책망을 잘합니다. 야단을 치고 잘못을 지적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하는 예언 사역자들이 있는데 그런 예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언의 목적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이고,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과 사랑이 없는 예언과 지식과 능력 행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에 근거하고 사랑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구제하고 희생하는 것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공동번역으로 보면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1)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랑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한다 하더라도”라고 옮길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 즉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면서 불 속에 뛰어든다고 할지라도, 이 부분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공동번역에 설명된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희생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을 당한다로 번역을 했습니다.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말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에 대한 표현과 복음을 위한 희생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우리가 구제하고 나누고 베푸는 일을 하는 것도 사랑이 없다면 형식적인 구제와 나눔이 되는 것이고 그런 나눔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얻을 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복음을 위해 순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외식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는데 결과적으로 사랑이 없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제와 나눔과 베품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실천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하고 복음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도 역시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사랑은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도 없다고 말한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오래 참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오래 참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이’는 ‘체념’, ‘수락’ 등을 의미하였으나 후에는 ‘포기하고 받아들임’, ‘참고 견딤’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성도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한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단순히 어떠한 상황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어려움을 견딘다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것을 억제하는 소극적인 의미로는 인내라고 할 수 있으며, 타인에게 손해를 당하였을 때 그것을 보복할 힘이 있으면서도 자제하는 적극적인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정한 사랑은 포기하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한 온유합니다. 4절을 다시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온유 하며는 헬라어 ‘크레스튜에타이’ 인데 ‘탁월한’, ‘유용한’, ‘친절한’의 뜻을 가진 헬라어 ‘크레스토스’와 같은 어군입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며 죄를 짓는 자에 대하여 단순히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선의의 봉사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의 수동적 측면이라면 ‘온유한 것’은 능동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4절을 다시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시기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 되고 높아지는 것을 질투하거나,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낮추려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한다는 것은 강한 질투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고 이렇게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하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4절을 다시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랑의 헬라어 ‘페르페류에타이’는 ‘교만’, ‘과장’, ‘무익한 잡담’이라는 의미이며, 문자적으로 ‘고무풍선처럼 부풀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랑은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가리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자랑을 일삼는 자는 타인을 무시하며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해 놓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랑하며 내세운다면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4절을 다시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은 자랑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이란 헬라어의 의미는 부풀어 오른다는 뜻으로 자신을 부풀려서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하게 되는 것인데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풀려서 생각하고 나타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5절을 보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자랑하는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그 행동은 당연히 무례하게 됩니다.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5절을 다시 보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이란 말의 헬라어의 의미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5절을 다시 보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성낸다는 말은 분노하다. 계속 재촉하다. 자극하다. 화나게 하다. 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꾸 재촉하고 못살게 굴어서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고 자신도 화를 내고 분노를 잘 표출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참아주고,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그러므로 자신도 기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5절을 다시 보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 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콘’은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래적인 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저속하고 비열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지’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제타이’는 ‘로고스’(말씀)에서 유래한 동사로 ‘계산하다’, ‘셈하다’라는 의미이며 ‘악한 것’을 보복하려는 심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전가 시키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악한 것을 전가 시키지도 않는 것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6절을 보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의를 따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는 성경적 개념에서 예수님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옳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의한 방법을 따르지 않고 손해가 되더라고 옳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론은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견디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은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용서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믿어주면서 기다리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사랑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3. 사랑이 제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11가지를 말한 바울 사도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이 제일이다. 즉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데
 
사랑만이 영원하고 온전하다고 말했습니다. 8-11절을 보면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 사도는 은사와 사랑의 차이를 말하면서 은사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은사를 행할 때 은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예언도 부분적인 것이고, 능력을 행하는 것도, 신유의 은사도, 모든 것이 부분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한 것이고 사랑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은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 즉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전까지만 은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사랑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다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완전한 나라가 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불완전한 것은 필요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만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 사도는 결론적으로 우리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언급하는데 이 세 가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믿음은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망도 역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소망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소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하되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면 살아갑시다. 우리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됩시다. 우리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고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하나 된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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