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접하는 자에게 주신 권세(1월 2일 신년 주일)
요한복음 1:9-18(신약 142)
 
2022년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 긴 시간 코로나 19라는 긴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아직 코로나 19 터널을 다 통과한 것은 아니지만 2022년은 코로나의 터널이 끝나고 일상회복이 이루어지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 힘들 일보다 감사 할 일이 많은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해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 새로운 희망을 갖고 소원을 마음에 품고 시작하게 됩니다.
 
또한 여러 가지 마음의 각오를 다지면서 금 년에는 이런 일을 꼭 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다짐하고 결단했던 일들이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지요.
 
신앙생활도 새해가 되면 올해는 정말 열심히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열심히 참여해야지 하고 결심을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서 다짐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연초에 작정한 것을 다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마음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난 못 지킬 거야 하고 아예 결심도, 다짐도 안 하는 것보다 설령 다 못 지킨다 할지라도 결심하고 다짐하고 다시 시도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성경 일독합시다. 가능하면 새벽기도 유튜브라고 참여합시다. 주일 예배 열심히 참여합시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합시다. 또한 목표를 정해서 전도합시다.
 
2022년 우리에게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새로운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 그리고 믿고 도전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지난 성탄절에 나누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에는 같은 말씀을 가지고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영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권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는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세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런 권세들을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접하는 자에게 주신 권세”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믿지 않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고 기대하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접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께서는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선포하면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여기서 그가 세상에 왔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의 헬라어는 ‘기노스코’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어떤 대상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요즘은 인터넷 검색을 많이 하는데 오늘날로 하면 검색을 통해서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습득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기노스코라는 단어는 이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알기 위해서 연구해서 지식적으로 알게 되는 것과 함께 어떤 것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온전하게 이해함으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식적인 탐구의 영역이라기 보다 알고 경험함으로 이해되어서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라 예수님을 만남을 통해서 이해되고 믿어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기 땅에 오셨으나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씀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서 자기 땅이란 말의 의미는 자기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께서도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요한 사도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소유의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라고 하신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겔 36: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주인 되시는 땅에 오셨지만 그 백성들이 당연히 알아야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우리는 알고 영접하고 믿는 성도들입니다.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요한은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의 주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2.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세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선포한 요한은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가 받을 권세가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받게 되는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원문상으로는 접속사 ‘데’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그러나’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는’ 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말은 단순히 신뢰한다는 말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을 알고 믿고, 그리고 마음 중심에 모셔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삶의 중심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두드리시는데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면 주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와 더불어 먹고 나와 더불어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은 원래는 자녀가 아니고 자녀가 될 수 없었는데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고 영접하면 원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022년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함으로 우리의 믿지 않는 가족들을 구원하고 주위 사람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자가 되었습니다. 13절을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을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했습니다.
 
첫째로, 혈통(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혈연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혈연과 구원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둘째로, 육정(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 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체의 정욕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사람의 뜻(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나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수양이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통 털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 역시 구원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으로 받은 것입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것임을 알게 해 주는 것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난 거룩한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올 한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으며 하나님에게서 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은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요한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우리들이 받을 은혜에 대해서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말씀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인데 이 단어는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에서 충만하다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6절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 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그 충만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성도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라고 기록했고 엡 3:8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라고 기록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충만하게 하신 그 은혜를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셔서 루터가 말한 것처럼 아무리 물을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샘처럼 은혜로 충만하게 하시고 차고 넘치게 하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은혜 위에 은혜’ 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라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요한 사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으며 하나님에게서 난 자로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셨는데 이 은혜와 진리는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우리가 받은 은혜와 진리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은혜로 이끌지 못합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생각나고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고 그 은혜 가운데 영생에 이르는 것입니다.
 
2022년 신년 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은혜 위에 은혜 즉 끊임없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2년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고 계속해서 샘물 같이 솟아나는 은혜 가운데 하늘의 은총과 복을 누리는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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