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름은 없다.(7월 28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4:1-22(신약 191)
 
지난 주에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을 고치므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베드로 사도는 솔로몬의 행각이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두번째 설교를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첫 번째 설교에서 한 것처럼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리 살리셨다고 말하면서 너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 전하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날이란 말의 의미는 예수님을 믿고 진정한 회개로 인해서 죄 사함을 받으면 죄로부터 해방되고 죄로부터 해방되면 마음에 진정한 휴식이 오게 되고, 몸과 마음이 상쾌하게 된다는 의미이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3장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걷게 된 것은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 것은 예루살렘 사회에 큰 이슈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들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를 통해서 십자가게 죽게 만든 사람들로 베드로 사도가 나타나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를 붙잡아서 당시 유대인 사회의 종교 재판을 담당하는 산헤드린 공회로 끌고 와서 심문하게 되고, 베드로 사도는 그들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고침 받은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이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가 너희가 물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건강하게 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이름 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이름이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 말고 위협을 하고 놓아주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 중심에는 베드로 사도가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을 중심으로 “다른 이름은 없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기적의 결과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통해서 걷지 못하던 장애를 가진 사람이 고침 받은 사건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게 되고 그 일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들에 대해서 먼저 기록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난 결과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 보면
 
믿는 자가 남자만 약 오천이 되었습니다. 4절을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났지만 처음에는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설교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아서 건강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은 이미 예언되어진 대로 오셔서 우리에게 새롭게 되는 날을 열어주셨고,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려고 오셨다고 설교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 되었습니다. 고대 시대에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인구를 계산할 때 남자 장정들만 숫자로 인정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유대인들의 전통대로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어린 아이와 여자들까지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셨을 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았거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도들이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반면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처럼 유대 지도자들은 싫어했습니다. 1-2절을 보면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4: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사도들이 말씀을 전한 곳이 성전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제 구시 즉 오후 세시 기도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왔다가 그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이야기를 지도자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그 자리에 와서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예수님을 너희가 죽였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는 말과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설교는 결국 자신들 유대 지도자들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이고 자신들이 죽게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부활하게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일반 유대인들은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유대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서 가두었습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결국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죽였다고 하는 것이기에 듣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 해서든 더 이상 전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일단은 잡아서 가두어 두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잡아서 옥에 가두고 핍박을 하면 두려워서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을 사도들을 잡아서 가두었습니다. 아마도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소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잡아서 가두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전한 곳이 성전이고 성전에 대한 관리 책임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은 잡아서 가두어 두었을 것입니다.
 
2. 공회에서 심문을 받게 된 사도들
사도들을 잡아서 가두어서 이튿날이 되었을 때 감옥에 가두기 위해서는 죄명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서 사도들에 대해서 심문을 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심문을 한 것은 무슨 죄인지를 분별해서 죄인이라고 판결을 해서 가두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질문을 하는데 너희는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5-7절까지를 보면
4: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적인 판단을 해서 처벌할 수 있는 자치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성전 솔로몬의 행각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판결을 하고 처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사도들을 산헤드린 공회에 세워서 심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 질문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했느냐는 것이 첫 번째 질문인데 이 질문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는 힘과 능력이란 의미로 너희는 무슨 힘과 능력으로 이 병자를 낫게 했느냐는 질문으로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묻는 것은 사도들이 어떤 술수를 써서 낫게 했다. 는 의심을 품고 하는 말로 마술이나 미신적인 종교 행위를 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술이나 미신적인 종교 행위를 한 것이라면 산헤드린 공회는 종교재판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도들을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의도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너희는 종교 지도자의 권한이 없으면서 성전에서 병자를 고치고 설교를 하는 일을 했느냐는 의미로 질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도 유대 지도자들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왜 그 이름을 전하느냐는 의미로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사용한 권세와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8-11절까지를 보면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당당하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고 빌라도가 재판을 통해서 죽였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베드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너희는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부활하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름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고침을 받아서 이렇게 건강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있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맞지 않은 이단이고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그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14-18절까지를 보면
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4: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4: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답변을 듣고 그곳에 같이 있는 병 나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공회에서 나가라고 한 다음에 자기들까지 사도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이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이 더 퍼지지 못하고 위협을 하고 이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자고 결의한 다음에 사도들을 불러서 경고하기를 앞으로는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했습니다. 19-20절을 보면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가 하는 말 즉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전하지도 가르치지도 말하고 한 그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즉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4.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베드로 사도는 산헤드린 공회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면서 구원을 위한 이름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당당하게 전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선포하면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 사도는 구원에 대한 불변의 진리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진리로서
 
첫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외에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분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살아계시고 마지막 때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자이십니다.
 
둘째, ‘구원을 받다’의 헬라어는 ‘헤 소테리아’(ἡ σωτηρία) 인데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 어둠의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 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 이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담대하게 오직 예수님 이름 외에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선포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상히 여겼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원래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니고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 하던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공회에서의 답변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특별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학문 없는 범인이란 말은 공부를 하거나 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란 뜻으로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공회원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도 잘하고 사람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지 라는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면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공회는 사도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위협하고 놓아주었습니다. 21-22절을 보면
4: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도들을 통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고침을 받았고 사도들이 하는 말에서도 문제를 삼을만한 내용도 없었고 그들 곁에는 고침 받은 사람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베드로와 사도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상황에서 마땅히 처벌한 조항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을 하고 놓아줄 수밖에 없었고 이 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지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어려운 상황을 만날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은 모든 상황이 복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구원의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혼과 육체와 삶이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참빛 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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