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으로 사는 성도(11월 12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4:13-18(신약 332)
 
주보에 있는 글입니다.
 
경계를 넘어설 때
 
나이 쉰 살에 크레파스를 들고 처음 그림을 시작한 원은희 작가는 말했습니다.
“반드시 경계를 넘어서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넘어서기 전에는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진실을 경계를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넘어선다는 것은 용기로부터 시작한다. 용기는 늘 기쁨을 가져왔다. 경계를 넘는다. 충분히 기쁘고 감사할 준비가 됐다. 매일매일 설레고 떨리는 삶을 확장하려 한다.”
 
경계를 넘어설 때 익숙함을 떠나야 하는 긴장이나 아쉬움도 있지만 새로운 만남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생각과 계산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뜻밖의 선물들을 얻게 됩니다.
 
인생은 언제나 초행길입니다. 그 길을 만드시고 이끄시는 분과 함께라면 언제나 최선의 길이 펼쳐질 겁니다. 안주하려고 했던 나른한 삶의 경계들을 과감히 넘어서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음과 나중, 현재와 미래에도 늘 함께하십니다.
 
큰 두려움을 갖고 경계를 넘어서야 했던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가슴에 품고 승리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익숙한 문화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 익숙하신 분들은 교회 나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기 위해서는 그동안 익숙해 있던 문화와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와 습관을 몸에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건이라고 표현하시고 하고, 신앙생활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다양한 우상의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에서 황제를 신성시하도록 했는데 기독교는 우상을 거부하고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당시 로마정부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우상 숭배자들과 정통 유대주의자들에게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박해 속에서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재림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핍박과 박해를 받지만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의 나라로 인도하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순교와 박해를 견디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곧 다시 주님이 오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순교를 당하면서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곧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재림을 기다리던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세상을 떠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살아서 주님을 다시 만날 것이라고 그 날을 기다렸는데 육신의 잠을 자는 상황이 오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 품에 안기고 재림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실망하는 것을 알고 편지를 보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하면서 성도의 죽음과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에는 죽은 자들에게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을 믿던 성도들이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됨으로 인해서 이별을 슬퍼하는 성도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이고 또한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소망으로 사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소망으로 사는 성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 슬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은 분명 슬픈일 입니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간다면 우리는 서로 헤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슬퍼하게 됩니다.
 
아들이 군 입대를 할 때도 다시 돌아올 걸 알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라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슬픈 일입니다.
 
우리와 함께 생활하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잘 아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것은 분명 슬픈 일 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왜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3절을 보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입니다. 죽음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지만 잠은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성도의 영혼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면 육체에서 영혼이 없어지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게 되고 그런 상태를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고 주님 다시 오실 때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잠자는 자들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 밤 중에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보고 슬퍼서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픈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슬퍼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13절을 다시 보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이고 주님 다시 오실 때 모든 성도가 부활에 참여하고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가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우리의 육체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은 몸은 잠에서 깨어나듯 다시 부활체를 입고 깨어나서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한 소망은 바로 이런 소망을 말하는 것이고 이런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영원한 이별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오게 된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은 장례를 치루면서 고인이란 표현을 쓰지 말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 아니고 잠자는 것이기에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에 고인이란 말을 쓰지 말자고 말하는데 물론 이별은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 부활(재림)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소망으로 사는 성도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슬픔을 가진 성도는 부활 신앙과 재림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면 보통 3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1년 정도는 우울증에 빠질 수 있을만큼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런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인데 바울 사도는 특별히 부활과 재림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활과 재림을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14절을 다시 보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육신을 믿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지 못하면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이란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을 믿습니다. 또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다시 14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고 그리고 마지막 날 다시 오시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예수님을 믿다가 잠을 자는 분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육체의 잠을 자고 있지만 주님이 오실 때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육체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과 영혼이 분리될 때 우리는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고 영원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14-17절까지를 보면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육체가 잠들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품 안에서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있는 것이고 주님 다시 오실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주님의 나라에서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모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죽지도 아프지도 않고, 슬픔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1:3-4절을 보면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3. 서로 위로하라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이별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소망 없는 이들과 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음이 아프고 힘들고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공동체는 서로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서로 위로하라는 말은 먼저 보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서로 위로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고후 1: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 1: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부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성자 예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넘치고, 성령의 위로로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위로가 교회와 성도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우리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성경)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롬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말씀의 위로를 통해서 소망을 갖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성경에서 위로의 말씀이 우리의 심을 적셔주십니다. 성령안에서 위로를 얻게 되고, 말씀안에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기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이 위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위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소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재림과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과 박해와 슬픔과 헤어짐을 경험하게 되더라고 서로 위로하면서 함께 더불어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고 교회는 서로 하나 되어 위로하고, 격려하고, 중보 기도 하면서 사랑으로 하나 되어 주님의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살아가는 참빛교회 모든 성도가 슬퍼하기보다 기뻐하고, 부활과 재림을 소망하면서 서로 위로하는 공동체로 하나님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교회와 가정과 각자의 삶의 현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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