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9월 3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마태복음 16:21-28(신약 28)
 
그 어느 해보다 무더웠던 8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째 계속해서 무더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현상은 환경의 파괴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자연 보호과 환경을 보호해야 할 이유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나타나는 다양한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에는 편한 것이 미래의 지구를 아프게 만들고 지구환경이 아프게 되면 결국 지구에 살아갈 우리의 후손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주님 곧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론이 있었고 주님 곧 오신다는 믿음이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일을 소홀히 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 때문에 지구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은 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창조하신 그대로 보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의 부주의함으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고 지킬 때 우리가 사는 동안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행히 무덥고 지루한 여름이 어느덧 조금씩 물러가고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오고 있습니다. 무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무더운 여름이 있어야 좋은 열매들이 맺힙니다. 무더위를 잘 견딘 식물들은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알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더위를 견딘 식물이 좋은 열매를 맺듯 우리의 삶에도 시련이란 과정을 통해서 더 좋은 것을 풍성히 거두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시매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합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다음에 아무에게도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다는 것으로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해서 그리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 즉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빌리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17-19절까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업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부터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고침을 받고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면 아마도 제자들도 예수님 주변에서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지 않고 고치시고, 위로하고, 전파하시고, 가르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의 때가 다가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지막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작스럽게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놀라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예수님을 붙잡고 항의하며 말했습니다. 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죽으시고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시자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하면서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먼저 ‘주여 이 일이 당신에게 정녕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고 ‘그 일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실 것입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항변이란 단어는 꾸짖다. 비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 어의없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의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을 듣고 그런 일을 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시도록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리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런 행동이 나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행동이 제자로서 선생님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다고 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고 우리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그런 의지 표현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일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사탄의 일이라고 말씀하시고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편에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대로 하려고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려는 일, 우리들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2.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수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제자들도 수난을 받는 상황이 올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즉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내가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인데 내가 십자가를 지고 너희 앞에 가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주어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할 때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내가 앞설 때 주님이 일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생각과 내 방법을 내려놓고 내게 주어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설의 법칙을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지만 나를 위하서 자기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역설의 법칙을 말씀하십니다. 가지려고 하면 없어지고 나누고 베풀면 풍성해 진다고 말씀하시고 죽을 것을 각오하면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풍성해지고 주님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목숨을 아까워하고 내 것을 아까워하면 모두 잃게 되지만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내려놓으면 풍성해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을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내 생각대로 살면서 세상에서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할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법을 따르고 그 결과 생명 즉 영생을 잃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심지어 온 천하를 다 얻었다 해도 생명을 잃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없고 영생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다른 그 무엇보다 영생을 위한 길을 따르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님은 결국은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 보응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마지막 때 주님께서 그에 대해서 보응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이 행한대고 갚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7절을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승천하실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결국에는 마지막 때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승천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셨다가 마지막 때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은 각자가 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27절을 다시 보면“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상급을 받는 것은 믿음의 행함에 따라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서게 되는데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십니다. 우리는 간신히 구원받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간신히 구원받는 성도가 아니라 주님 앞에 섰을 때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됩시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인자가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사실 이 구절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희망이자 절망이 된 말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너희 중에 내가 다시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자신들이 살았을 때 주님 다시 오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난과 박해를 견디어 냈는데 주님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다시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내가 살았을 때 주님 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시간의 개념에서 보면 하루가 천년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의 개념에서 너희 중에 살아서 인자가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은 이단들이 주님이 오실 날을 예언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 오실 날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오심을 기다리지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리는 대림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의 것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우리의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을 때 진정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나를 부인하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시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믿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갈 때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버리면 풍성해지는 성경의 법칙을 삶 속에 경험하는 참빛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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