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헌신(8월 27일 오후 예배)
성 경 : 요한복음 12:1-11(신약 168)
 
신약성경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이야기 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이야기합니다. 사두개인은 사독의 후손들로 제사장 계열로 이루어진 집단이고 바리새인은 주로 랍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유래를 보면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나온 말로 율법에서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태도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BC 130년경인 마카비 시대에 최초로 등장했는데 이는 바벨론 포로기 동안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결과로 일반 유대인들과 회당 중심으로 펼쳐졌던 움직임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리새인들이 등장하는 역사적인 상황을 보면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그가 세운 제국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그중 셀레우코스 제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이어받은 제국이자 가장 활발하게 정복 전쟁을 벌였습니다. 셀레우코스의 네 번째 국왕인 안티오쿠스 4세는 동방지역으로 영토를 넓혔는데 그중에는 이스라엘도 있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다른 어떤 민족보다 유대인을 극심히 핍박했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내려온 신’이라는 뜻의 ‘에피파네스’(Ephipanes)라고 바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유일신 하나님은 자신의 왕권을 거슬렀기에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이 신앙을 버리도록 극심하게 핍박했습니다.

이런 핍박 가운데 목숨을 걸고서라도 신앙을 지켜야 한다며 앞으로 나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신앙을 지키자고 앞장서서 희생하는 이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신뢰와 존경을 보내며 민족의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람들을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의 ‘바리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를 물리친 후 일반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율법주의가 되었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그들이 가졌던 신앙적인 순수함이 사라지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으로 변질 된 것입니다.
 
우리가 몇 주 동안 요한복음 11장을 살펴보았는데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라고 표현한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반면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구체적인 음모를 진행하게 됩니다. 12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게 될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부분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살고 있는 동네이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 자주 머무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베다니에 오셔서 머무시게 되는데 이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비싼 행유를 부어드렸습니다.
 
마리아는 귀한 향유를 예수님에게 드린 것이고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마리아의 헌신” 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마리아의 헌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주신 후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나사로의 가족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이고 너무나 큰 은혜와 축복의 사건이었습니다.
 
아마도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베다니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열었습니다. 1-2절을 보면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시자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의 기록만으로 보면 이 잔치는 나사로 가족이 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나병 환자 시몬에 집에서 잔치가 열렸다고 기록했습니다.
 
나병 환자 시몬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왜 잔치를 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병 환자였던 시몬이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연 것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해서 식사 대접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3절을 보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지만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결혼을 위해서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순전한 나그 한 근의 향유를 준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향유의 그 당시 시세가 삼백 데나리온 정도 한다고 가룟 유다가 말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 되는 돈으로 약 300데나리온은 거의 일 년 동안 일해서 받은 돈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부어 드린 향유는 결혼을 위해 준비한 것일 수 있고, 또한 마리아가 소유한 것 중에 가장 비싸고 귀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어 예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단순히 비싼 것을 주님께 드렸다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그 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다음에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주님이시고 자신의 예수님의 종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머리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가장 아래인 발을 닦아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는 의미와 존경을 다해 겸손하게 섬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2. 마리아의 헌신을 비판했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리는 것을 본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요한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예수님을 잡아 줄 가룟 유다라고 말했습니다. 4절을 보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만 마리아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어떤 사람들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헌신을 보고 가룟 유다만 비판을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중에서도 마리아의 헌신을 비판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가룟 유다 혼자서 비판한 것처럼 기록을 했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나중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돈 받고 판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원래 예수님을 넘겨 줄 만큼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비판한 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있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나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5절을 보면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아니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것을 이렇게 사용해 버리다니 당신 제정신 인거야? 그런식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이 비싼 것을 이렇게 허비하지 말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라고 비판을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나누고 베풀라고 하셨으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 비싼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좋은 일에 사용하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는 투로 말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교회에 헌금할 돈을 헌금 대신에 주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헌금으로 드릴 것을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사용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겠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 드릴 것과 나누는 것은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비싼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유월절 명절을 앞두고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렇게 말하면서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는 도둑이라고 요한은 설명을 했습니다. 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돈궤를 맡아서 처리하는 회계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들어오면 그중에서 일부를 훔쳐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가룟 유다가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고 한 것은 판 돈을 예수님께 드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하면 그 중에 일부를 빼돌리려는 생각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유다가 마리아를 비난한 것은 자기에게 맡겨서 일정액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설명하면서 이 일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을 받고 파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암시를 한 것입니다.
 
3.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가룟 유다와 일부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난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면서 평가를 하셨는데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이 구절을 쉽게 해석한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하는 대로 가만두어라. 그 여자는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며칠 뒤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은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는 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었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준비한 것으로 장례를 치루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은 제대로 장례를 치루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앞으로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장례를 위해서 아무것도 너희가 할 수 없게 되지만 지금 마리아가 이렇게 한 것은 앞으로 있을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헌신이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하실까? 이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헌신이라고 평가 받은 것과 같이 우리가 하는 헌신이 하나님을 특별한 의미가 있는 헌신이 되리라 믿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만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든지 도울 수 있지만 나에게 하는 것은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으로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고 주님께 인정 받는 길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마리아의 헌신과는 관련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대제사장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9-11절을 보면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신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과 나사로를 같이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마리아의 헌신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린 마리아처럼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되 기회가 주어질 때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 오실 대까지 증거되는 축복의 사건이었듯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과 교회에 기억되는 헌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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