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풂의 원리(8월 28일 낮 예배 설교)
누가복음 14:1-14(신약 119)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자연스럽게 높고 낮은 자리가 형성되게 마련입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처음에는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하다고 말하면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높은 낮음이 구분되게 마련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구분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은 세상의 직책과는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직책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교회에서의 직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느샌가 직분이 높고 낮음을 구분 짓는 것처럼 인식되고 그런 인식이 고착화 되어 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모든 성도들 즉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몸은 더 귀하고 높은 자리가 있고 낮고 천한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들은 다 소중합니다. 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지체는 낮은 지체이고 덜 중요한 지체인 것처럼 우리가 생각할 수는 있지만 몸에 있는 지체로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고 낮은 지체는 없습니다.
 
교회의 본래 모습은 서로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사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시작된 교회는 섬김 공동체였고 낮은 곳에서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을 입으시고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희생의 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데 빌립보서 2:5-8절까지를 보면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베푸는 자가 되라”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베풂의 원리”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가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살리는 일을 하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자주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상황에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위험에 처한 사람이나 동물은 건지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걸린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1-2절을 보면
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14: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안식일 회당 예배 끝나고 난 다음에 바리새인의 지도자가 예수님을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다른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엿보고라는 말은 바리새인 지도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했는데 그곳에는 바리새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순수한 의도에서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바리새인들과 협의를 해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어떤 흠이라도 잡으려고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옆에는 수종병 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또는 어떤 말을 하든지 그 말이 율법이나 유대인의 전통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예수님 옆에 수종병 걸린 사람이 있음으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인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지를 지켜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수종병 걸린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옆에 있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는 말과 예수님의 옆에 수종병 걸린 사람이 있다는 말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지만 예수님 옆에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옆에 있는 수종병 환자를 고쳐 보내셨습니다. 3-4절을 보면
1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14: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수종병은 복부에 물이 차서 심장, 신장, 간장 등을 압박하고 몸이 붓는 병으로 헬라어로 ‘휘드로피코스’ 인데, ‘물’을 뜻하는 ‘휘드로’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질병이라기보다 하나의 증상으로, 신체의 세포조직에 체액이 비정상적으로 유출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 질병은 외부로 체액이 유출되는 것이라 쉽게 분별하게 되는 병이었던 같습니다. 예수님은 옆에 있는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놓고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고쳐 주는지 자세히 지켜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이 사람을 고쳐 주시려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랍비들의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 죽을 병이 걸린 사람을 고치는 것은 허용이 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율법교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랍비적인 규례에 따라서 대답을 해야 하지만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의도로 질문하셨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습니다. 수종병은 죽을병은 아닙니다. 그러나 몸에서 계속해서 체액이 흘러나오는 것 때문에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고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안식일이라도 위험에 처하면 건져주지 않겠느냐? 5-6절을 보면
14: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14: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수종병을 고쳐 주셔서 집으로 가게 한 다음에 다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마땅히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나 질병으로 고통당한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같은 차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살리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쳐 주는 것도 살리는 일이고, 우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죽을 영혼을 살리고, 고난과 시련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서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살리는 일을 합시다. 우리의 말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를 주어서 살리는 일을 합시다.
 
2. 청함을 받을 때 끝자리로 가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상황에서 수종병을 고쳐 주셨고 또한 계속해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잔치 집이나 식사에 초대를 받았을 때
 
상석(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사람들이 초대할 때 상석이라고 정해놓은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초대를 할 때 대충 어떤 사람들을 상석에 앉게 할 것인가 나름 기준을 갖고 상석을 준비하게 되는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상석에 앉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저런 행사에 가보면 늘 상석에 가서 앉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상석에 앉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상석에 가서 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석에 가서 앉는 사람들은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자신은 상석에 앉을 위치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잔치를 열거나 할 때 상석에 앉을 분들을 미리 정해서 요즘 같으면 이름표를 붙여놓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이 없음에도 상석으로 가는 분들이 항상 있습니다. 자기는 이름표가 있던 없던 상관없이 상석에 앉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석을 찾아가서 앉는 사람들을 보시고 높은 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9절을 보면
14: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14: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을 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상황들이 자주 발생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은 상석에 앉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상석에 가서 앉아 있는데 잔치를 여는 사람이나 모임을 준비하는 사람이 생각하기에 그 사람은 상석에 앉을 사람의 명단에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때론 주인이 초청을 하지 않았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높은 사람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주인은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더 높은 사람이 앉도록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리가 높은 자리라고 생각하고 상석에 앉았던 사람은 부끄러워 하면서 끝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상석에 앉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인은 끝자리 앉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얼마나 낯뜨거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들을 가끔 보게 되는데 자기 자리가 상석일 거라고 생각하고 가서 앉은 사람은 초대한 사람이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하면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화를 내거나 뻔뻔하게 다음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자리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초대를 받았을 때 상석을 찾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차라리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11절을 보면
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처음부터 자신이 상석에 앉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상석에 앉았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오면 자리를 내주고 끝자리로 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처음부터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자리에 가서 앉는 것입니다. 거기가 내 자리이든 아니든 일단 가장 낮은 자리 곧 끝자리에 가서 앉아 있으면 초대한 사람이 왜 거기 앉아 있느냐고 말하면서 상석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게 될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높고 낮음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찾아가서 낮은 자리에 앉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찾아가고 대접을 받는 자리보다 대접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오히려 복이 되는 일입니다. 대접을 잘 받는 상석이 아닌 심부름을 하는 끝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앉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여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3. 베풂의 원리
예수님은 앞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살리는 일을 해라. 두 번째는 상석인 아닌 끝자리로 가라 즉 대접받는 자리보다는 섬기는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베푸는 일을 할 때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베풀려고 할 때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누군가를 초대해서 대접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저 사람을 대접함으로 나에게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입니다. 대접이 목적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초대한다고 할 때는 대부분이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이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초대하게 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초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군가를 초대하려고 할 때 너보다 부자인 사람, 더 보다 가진 같이 많은 사람을 초대하면 그 사람은 너에게 더 좋은 것으로 대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초대하면 대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무엇을 대접해야 하는지 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또한 부한 사람들은 나중에 뒷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겨우 그걸 대접하려고 날 초대한 거야 하는 불쾌해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누군가를 초대해서 대접하는 것은 베푸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으로 우리가 누군가에 나누고 베풀려고 할 때 너보다 형편이 좋은 사람에게 네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베풀어 봐야 상대방은 별로라고 생각하고 너에게 더 좋은 것을 주어서 너를 주눅들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대접하려면 어려운 이웃들을 초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을 보면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우리가 누군가를 초대해서 대접하고 베풀기 원한다면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보다는 가난한 사람, 그리고 몸이 불편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초청해서 대접하고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분들은 무엇을 대접하고 무엇을 베풀든지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근래에 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여러 건 들었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는데 주변에서 돌보아 주고 베풀어 주는 사람들이 없고 또 매번 도움만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가족이 함께 생명을 끊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가 돌보아야 할 대상은 우리보다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대접을 하고 베풀어서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손길을 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사랑의 베풂은 복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을 보면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초청해서 대접하고 베풀어 주면 그 사람들이 나에게 갚을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돌려받기 위한 대접과 베풂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으로 베풀어 주면 그것을 사람에게 돌려받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잠 3: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우리가 넉넉하고 풍성하지 못해도 나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나의 작은 손을 펴서 나누고 베풀 때 그것이 내 손에서 사라짐으로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칙에 의하면 더 풍성하고 윤택해지는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리에 앉고,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나누고 베풀어서 진정한 베풂을 실천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참빛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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