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믿음을 보시고(3월 6일 주일 오후 예배)
성 경 : 마가복음 2:1-12(신약 55)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 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 박경리의 중에서 –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 가버나움이라고 1장에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셨고, 점차적으로 인근 지역에 있는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다니시면서 여러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2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네 사람이 침상 채로 들고 예수님께서 나왔는데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네 사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방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침상 채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닌 그들 즉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장애물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1절에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여기서 수일 후에 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서 갈릴리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신 다음에 다시 가버나움에 오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으로 다시 오신 것이 며칠 지나서인지 모르지만 수일 후에 즉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셔서 어느 집에 머무시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머무신다는 소문이 사람들에 들렸습니다.
 
아마도 그 집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머무신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을 네 사람이 메고 예수님 계시다는 집에까지는 아무 어려움 없이 왔는데 막상 그 집에 도착해서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장애물이 있습니다.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 앞에 있는 장애물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2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심으로 인해서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왔다고 기록했습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들 중에 아직 예수님에게 나와서 고침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로 가심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병자도 있었을 것이고 귀신 들린 사람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 있었고 예수님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 앞에 있는 장애물을 부정적 장애물이 아니라 긍정적 장애물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고 병 고침을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정이 나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는 그 자리에서 나 때문에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되 내가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함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더불어 주님께 나아가고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 네 사람이 한 중풍 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이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중풍 병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병입니다. 따라서 중풍 환자는 말하는 것은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 사용 할 수도 없기에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중풍 병자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고침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에게 가서 고침을 받고 싶은데 혼자서는 갈 수 없으니 나를 예수님에게 데려 다 줄 수 있느냐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풍 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이 중풍 병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가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합심해서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풍 병자 자신은 믿음이 전혀 없다거나 예수님에게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이 더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중풍 병자가 예수님에게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네 사람이 합심을 해서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네 사람이 한 사람을 침상 채로 메고 예수님께 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마태, 누가복음에 침상 채로)
 
짐을 같이 들어보면 알지만 네 사람이 침상 채로 메고 예수님께 나오기 위해서 보폭도 적당히 맞추어야 하고 속도 맞추어야 하고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게 데리고 나오려고 할 때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오는 것과 같이 이런저런 어려움과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러 나올 때, 또는 어떤 사람들을 주님께 데리고 오려고 할 때 장애물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장애물 때문에 포기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네 사람은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있습니다.
네 사람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침상 채로 메고 예수님께서 계신 집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4절을 보면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혼자면 사람들이 많아도 비집고 들어가겠는데 네 사람이 침상을 메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집까지는 왔지만 예수님에게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달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은 자신들의 집이 아니고 남의 집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야겠다는 열정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내서라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풍 병자를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 방법을 무모하지만 도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4절을 다시 보면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팔레스타인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깥은 지붕으로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끔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으로 덮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중풍 병자를 지붕 위로 올려 온 사람들은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냈을 것인데 이때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드러난 들보 안으로 그 환자를 달아 내렸을 것입니다.
 
중풍 병자가 누운 침상을 메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높지는 않았겠지만 네 사람이 한 침상을 메고 거기에 환자가 있는 채로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상 채로 메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었습니다. 그리고 달아 내렸습니다. 줄로 침상을 달아 내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쪽이 빨리 줄을 내리면 환자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조심 달아 내렸습니다.
 
한 사람의 환자를 위해서 온 힘과 정성을 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있었기에 그 사람은 마침내 예수님 앞에 갈 수 있었습니다.
 
3.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으로 혼자서는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사람을 네 사람이 침상 채로 메고 왔는데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갈 수가 없게 되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침상 채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풍 병자는 예수님 앞에 도착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향해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병자가 아닌 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들이라고 할 때 병자가 포함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병자 자신도 예수님 앞에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네 사람에게 부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 즉 네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를 향해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이 사람의 질병의 원인이 죄로 인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향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자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6-7절을 보면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을 비롯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놀라운 역사를 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 시작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 중에서 흠 잡을 것은 없나 살펴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시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는데 감히 죄를 자한다고 하다니 하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8-10절에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2:9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시고 중풍 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둘 중에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것과 네 상을 들고 걸아가라고 해서 걷게 하는 것 모두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고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풍 병자의 질병이 죄 때문에 온 것이기 때문에 먼저 죄를 사해야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함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질병이 죄 문제로 온 것이라면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아야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포하신 다음에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보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내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중풍 병자를 향해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다음에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이제는 네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습니다. 12절을 보면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중풍 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사해 주셨고 또한 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중풍 병자의 죄 고백과 믿음의 고백이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직접 간구하지 않았을지라도 침상 채로 예수님께 나올 때 그 사람에게도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할 때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고백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을 아시고 죄를 사해 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메고 왔던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벌떡 일어나서 자기가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서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질병에서 고침받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도무지 경험한 적이 없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일어나 누워있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슬퍼했던 눈물의 상을 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참빛 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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