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12월 25일 성탄절 설교)
성경 : 요한복음 1:1-18(신약 142)
2024년 성탄절 예배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임마누엘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로 예배하는 복된 날입니다.
우리는 왜 12월 25일 성탄절로 지키는 것일까요? 성경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날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로 지키게 된 것은 정확하게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알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2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여 12월 25일이 아닌 1월 6일이나 10일, 4월 19일이나 20일, 5월 20일, 11월 18일에 축하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세기 후반까지 다양한 날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했다는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12월 25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4세기 초에는 로마에서 12월 25일에 성탄절을 축하했다는 사실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춘분 후 4일 째 되는 날인 3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초대교회 감독들인 터툴리안이나 히폴리투스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교부들은 구약의 족장들의 수태일은 사망일과 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신 날도 3월 25일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계산을 하니 12월 25일이 성탄절이 된 것입니다. 이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3월 25일 예수님의 수태일로 지키고 12월 25일 성탄일로 정해서 지킨 것이고 이것을 개신교도 그대로 받아들여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됩니다.
다른 주장은 로마제국의 미트라스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성탄절의 기원을 찾기도 합니다. 미트라스교에서 12월 25일은 ‘정복되지 않은 태양’ 의 탄생일이며 태양신 미트라스의 생일입니다.
교회가 이 문화를 받아들여서 빛으로 오신 주님의 탄생과 연결 시켰다는 주장입니다. 일종의 문화변용 혹은 토착화가 이루어진 셈인데 이 또한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태양의 신의 개념을 예수님에게 적용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가끔씩 성탄절을 12월 25일에 지키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날은 태양신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탄생일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이라는데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을 언제로 정해서 기념하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동방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짜를 4월 6일이라고 주장하고 1월 6일은 탄생일로 여겼다고 합니다. 동방교회는 1월 6일이 주현절이자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https://lkg00610.tistory.com/59915)
오늘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은 우리의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말씀이 있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셨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말씀을 선포하시면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데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하시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곧 말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덮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2절을 보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 사도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1절에 말씀하면서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말씀은 곧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야기 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그리스도이신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또 말씀 이신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서로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서로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를 말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같이 계시고 하나이시라는 의미로 이야기 한 요한 사도는 그가 세상을 창조하셨다. 고 말했습니다.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 창조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있으라 하시매 있었더라는 형식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있으라고 한 것은 곧 있으라고 말씀하시매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 생명은 하나님에서 왔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말씀이시고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이시기에 그리스도도 말씀이라고 말한 요한 사도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말하면 우리의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말은 영생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언젠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생명이란 이렇게 잠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 즉 영생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세상에 사는 생명인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인지의 결정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곧 바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에 대해서 현대어 성경은 “이 생명은 모든 인류에게 빛을 주신다.” 로 번역했고, 쉬운 성경은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와서 우리들에게 비추시는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빛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생명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빛을 받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음지 식물도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생명체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저는 화분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데 지하실에서 매번 화분 키우기에 실패를 했습니다. 지하실에서 화분을 잘 키우지 못하는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형광등이라도 계속 켜 두어야 지하실에서 화분을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생명으로 오셨고 생명을 살리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말씀과 빛이 없으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 어둠에 비추매 깨닫지 못했습니다. 5절을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의 원형 ‘카타람바노’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이해하다.’ 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죄악 된 세상은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 즉 어둠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과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의 빛으로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어둠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이 있어야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빛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추셨습니다. 9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참 빛’ 으로 번역된 원문은 ‘그는 참 빛이시다.’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공동 번역은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말씀과 빛은 같은 것이고 말씀이 곧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빛으로 우리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각 사람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서 말씀과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무리나 민족과 같은 개념이 아닌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개개인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 전체를 또는 어느 교회 전체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을 구원하시고, 우리 각 개인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각 사람에게 비추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말씀과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이시며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9-13절까지를 보면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은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것은 혈통이나 육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되는 것입니다.
즉 혈연으로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의지나 욕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참 빛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 었다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사도는 말씀이 그리스도라고 소개했는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에게 영광이 있는데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봄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셨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14-17절까지를 보면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은혜와 진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삼하 2:6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동일하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된 은혜요 축복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심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말씀과 빛으로 오셨다는 것으로 말씀과 빛은 곧 생명이며 영생인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말씀과 빛 가운데 거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참빛 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https://online.fliphtml5.com/yuhpd/rhmt/